사람과 기술이 함께 성장하는 기업 – 쏠리드

우리나라는 1997년 8월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벤처기업을 키우고자 했고, 이에 발맞춰 KT에서는 ‘벤처기업육성특별계획’을 발표하며 관련 정책을 추진했다. 정준 대표는 이를 기회로 그와 뜻을 같이하던 광통신 분야의 최고 전문가팀을 구성하여, 1998년 11월 KT 사내벤처 1호로 ㈜쏠리드의 전신인 주식회사 쏠리테크(Solid Technologies Inc.)를 설립했다. 위험을 줄이며 비교적 손쉽게 시장에 진입해 매출을 일으킬 수 있고, 기술력을 바탕으로 기존 제품과의 차별화가 가능한 ‘중계기’를 창업 아이템으로 선정한 정준 대표와 창업팀은 지속적으로 R&D에 집중 투자해 기술력을 추구하면서 공격적인 경영을 선포한다.

이후 디지털 광중계기, RF 중계기, WCDMA용 중계기 등을 적극적으로 개발한다. 비록 주변 기술 인프라 부족으로 모든 시도가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하였지만 이러한 기술개발은 현재의 쏠리드를 있게 한 원천이다. 중계기에서 기지국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한 쏠리드는 시장상황의 변화로 인하여 실패를 경험한다. 하지만 이때의 경험과 인력은 쏠리드의 자산으로 스며들었다. 쏠리드는 이를 바탕으로 국내 최초로 위성DMB용 중계기의 핵심인 ‘Gap Filler’를 개발하였고, 이는 쏠리드의 본격적인 고공 성장의 발판이 된다.

이후 시작된 3세대 WCDMA 서비스는 쏠리드에게 큰 혜택으로 작용하였고, 2005년 7월 코스닥에 상장하였다. 2006년에는 천억 클럽에 가입하면서 쏠리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벤처기업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새로운 도전과 선택의 시기를 대비하게 된다. 이처럼 창업부터 현재까지 쏠리드는 꾸준한 기술개발과 변화를 통해 고공 성장을 지속하였다. 쏠리드가 고공 성장을 지속할 수 있게 한 핵심역량은 무엇이며 R&D의 전략적 선택은 어떤 것이었을까?


Q1. 기지국 시장 진출에서 쏠리드가 처했던 상황에 대하여 본인이 정준 대표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이고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Q2. 쏠리드는 창업 초기 매우 높은 R&D 비중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높은 R&D 투자를 가능하도록 한 요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창업자/창업팀, 전략, 제품개발, 리더십의 네 가지 차원에서 분석하여 설명하시오)

Q3. 쏠리드는 결국 기지국 시장 진출에 실패하였다. 이후 정준 대표가 선택한 R&D 인력의 활용은 적절하였는가?

Q4. Gap Filler, WCDMA 시장에서의 성공으로 쏠리드는 기존의 R &D보다 시장수요에 적합한 제품개발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향후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쏠리드가 추구해야 하는 R&D 전략의 방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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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기술이 함께 성장하는 기업 – 쏠리드

“통신서비스 시장에서 중간규모의 기업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기업이 커져가면서 앞으로 큰 시장으로 나가야 할지, 아니면 현재 규모의 시장에서 지킬 것만 가져가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저희의 R&D 방향도 많이 바뀔 것 같습니다.”

– 정준 대표

쏠리드는 2006년 연매출 1,000억 원을 돌파한다. 1999년 20억 원의 첫 매출을 기록한 뒤,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 60배의 극적인 성장을 기록한 것이다. 쏠리드의 지속적인 성장 이면에는 정준 대표의 앞을 내다보는 넓은 시야와 이를 보조하는 쏠리드만의 차별화된 R&D 운용전략이 있었다. 창업 초기부터 선행기술에 초점을 맞춘 디지털팀은 디지털 광중계기 등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며 쏠리드의 기술역량을 세계에 보여주었고, 이는 기지국시장 진출 그리고 위성 DMB Gap Filler 세계 최초 개발로 이어지면서 쏠리드의 지속적인 성장을 견인했다. 그러나 쏠리드가 이렇게 선행기술과 불확실성을 내포한 영역에 꾸준한 투자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엔 시장수요의 진화에 초점을 맞춰 지속적으로 신제품을 출하했던 무선통신(RF)팀이 있었다. 무선통신팀은 In-Building형 및 지하철 중계기 등을 개발해 시장의 수요에 맞춰 초기부터 쏠리드가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는 데 기여했고, 이 자원을 바탕으로 디지털팀은 선행기술 쪽에 안정적인 투자를 할 수 있었다. 쏠리드가 구사한 상호보완적 R&D 운용은 빠르고 역동적인 통신서비스 시장에서 쏠리드가 생존을 넘어, 단기간에 빠른 성장을 일궈냈던 핵심 비결이다.

그러나 기업이 커져가면서 기술기반 벤처로서의 쏠리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지금까지의 성과보다 더욱 중요하게 부각됐다. 그 방향 설정에 맞춰 쏠리드는 R&D 운용전략의 틀을 재편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시장에 맞춘 연구개발과 장기적인 기술변화와 수요에 맞춘 R&D 투자 사이에 선 새로운 고민들로 정준 대표의 시름은 그 어느 때 보다 크고 깊었다.

이동통신 시장의 개요

국내 이동통신 서비스 시장의 발전

국내 이동통신 서비스 시장은 1996년 미국의 Qualcomm사가 만든 CDMA(Code Division Multiple Access)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시킨 2세대 이동통신 서비스(2G)가 개시하며 본격 성장하게 된다. 2G는 아날로그 신호로 음성을 주고 받던 것에서, 음성을 0과 1의 디지털 신호로 바꾼 뒤 압축해 전송하는 기술로, 이를 통해 음성 데이터 용량과 데이터 손실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또 디지털 전송방식이기 때문에 음성신호 뿐 아니라 텍스트나 이미지 송수신이 가능해졌으며, 통신비와 단말기 가격이 저렴해져 휴대전화의 대중화가 본격화됐다. 당시 2세대 이동통신은 유럽식인 GSM(Global System for Mobile Communication)과 미국식인 CDMA 두 가지 표준이 전세계 시장을 양분하고 있었는데, 이후 한국은 1.7~1.9GHz대의 디지털 방식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CDMA PCS(Personal Communication Services)를 도입했다(Exhibit 1).

PCS의 도입은 국내 기술로 상용화된 CDMA를 대중화했고, 또 PCS 사업자의 참여는 이동통신 서비스 시장을 폭발적으로 성장시켰다. PCS 사업이 시작된 1996년 10월 이전만 해도 국내 이동통신 가입자수는 SK텔레콤(011)과 신세기통신(017) 2개사를 합쳐 500만 명에 그쳤으나, PCS 3사(KTF, LGT, 한솔텔레콤)의 참여로 본격적인 요금 경쟁에 돌입하자 신규가입자가 급증했다. 그 결과 PCS 사업 9개월만인 1997년 6월 국내 이동통신 가입자수는 세계에서 5번째로 1000만 명을 돌파했다. 특히 5개 회사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에서조차 구현되지 못했던 지하철과 지하공간에서의 원활한 통화서비스가 가능해지면서 서비스의 질적인 면에서 선진국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2세대 이동통신은 완전한 디지털 방식의 서비스를 구현했지만, 주로 음성위주 통화로 설계돼 고속 데이터통신을 지원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이후, 2G의 약점을 보완하는 3세대 이동통신(3G)으로 IMT-2000 서비스가 등장한다. IMT-2000은 하나의 단말기로 고품질의 음성은 물론, 영상과 데이터 등 멀티미디어 통신을 할 수 있는 서비스다. 즉 별도의 로밍 없이 세계 언제 어디서나 동영상을 보고 깨끗한 음질의 통화를 즐길 수 있다.

당시 주무부처인 정보통신부는 한·일 월드컵이 열리는 2002년 6월 이전에 3G서비스인 IMT-2000을 상용화해 전세계에 ‘IT강국 한국’의 이미지를 알리고자 했고, 통신사들은 IMT-2000의 사업자가 되기 위해 한 치의 양보 없는 경쟁을 벌였다. 여러 논란과 화제를 일으켰던 IMT-2000 사업자 선정은 당시 전세계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유럽의 GSM 방식의 발전 모델인 WCDMA 방식 2개사와 미국식 CDMA 방식 사업자 1개사를 선정하며 마무리됐다. WCDMA(Wideband Code Division Multiple Access)방식에는 이동통신 3사(SKT, KTF, LGT)가 모두 지원했고, CDMA 방식에는 하나로텔레콤과 무선호출(삐삐) 사업자들이 주도하는 ‘한국 IMT-2000’ 컨소시엄이 단독으로 지원했다. 2000년 12월에 발표된 IMT-2000 사업자 선정 결과, WCDMA 방식의 2개 사업자로는 SKT와 KTF가 선정되었고, LGT는 이 두 사업자에 비해 점수가 다소 낮아 탈락했다. 그러나 CDMA 방식에 지원한 ‘한국 IMT-2000’이 전체 심사결과에서 기준점수 미달로 허가를 받지 못하자, 별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한 정부는 LGT를 2011년 8월 CDMA 방식의 IMT-2000 사업자로 선정했다.

그러나 직후, 전세계적인 닷컴버블 붕괴로 IT기업에 자금 부족 현상이 발생하면서 유럽의 주요 통신 사업자들은 2세대 GSM 네트워크를 3세대인 WCDMA로 바로 이어가지 못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도 당초 계획대로 2002년 5월 월드컵 이전에 WCDMA를 실현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결국 SKT와 KTF는 대안으로 CDMA 방식의 IMT-2000인 CDMA 1xEV-DO서비스를 준비하게 됐다. 당초 CDMA 방식의 IMT-2000서비스는 LGT만이 허가를 받았지만, 정부는 선도적인 IMT-2000의 확산을 위해 SKT와 KTF에도 허가를 해준 것이다. 이후, 2002년 5월 KTF는 세계 최초 동영상 서비스인 ‘핌(Fimm)’을 런칭하고, 같은 해 11월 SKT 역시 ‘준(June)’을 내놓는다. 수년 뒤 진정한 의미에서의 3세대 이동통신 서비스라고 할 수 있는 WCDMA가 구현됐다.

이동통신 장비시장의 구성

이동통신 서비스를 가능케 하는 장비는 크게 교환국, 기지국, 중계기 등으로 구분된다. 그 중, 기지국과 중계기 등의 통신시스템 시장은 이동통신 서비스의 품질과 서비스 영역을 결정하는 핵심 부분이다.

기지국은 무선통신 서비스를 위해 네트워크와 단말기를 연결하는 설비로, 이동통신에서 주파수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넓은 지역을 작은 구역으로 세분화하여 셀로 나누며, 기지국은 이 셀 상에서 휴대전화와 교환국 사이의 중계역할을 한다. 따라서 각 셀 단위로 하나의 기지국이 존재하며 (Exhibit 2), 이를 통해 소비자는 고품질의 통신 서비스를 받는다. 기지국 내부 구조는 무선통신을 처리하는 안테나 부(Radio Unit, RU)와, 데이터를 처리하는 데이터 부(Data Unit, DU)로 연결돼 있다.

기지국을 통해 소비자는 통신 서비스를 받지만, 이동통신 서비스를 완전하게 제공받지 못하는 서비스 음영지역(도심, 지하철, 전파사각지대 등)에서는 고품질의 통신 서비스를 받기 어렵다. 이 문제는 기지국을 확장해 해결할 수 있지만, 통신 서비스 사업자가 전파 사각 지역에 일일히 기지국을 증설하는 덴 큰 비용이 든다. 따라서 저렴한 비용으로 비교적 높은 통신품질을 제공하고 서비스 범위를 확대할 수 있는 ‘중계 시스템’ 이 활용된다(Exhibit 3). 즉, 중계기는 기지국 밑단의 영역에서 원활한 통신 네트워크를 지원하는 것이다.

무선통신 네트워크 구조를 단순하면 다음과 같다. 교환국에서 나오는 신호를 기지국에서 제어해 일반소비자에게 전달하지만, 기지국 혼자서 모든 영역을 감당하는 것은 어렵다. 특히 건물 안이나 지하철과 같은 지역에서는 서비스 품질이 급격히 떨어지는데, 이처럼 기지국이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을 중계기가 보충한다. 기본적인 통신 네트워크 구조의 각 부분을 역할별로 비유해보면 교환국을 도매시장, 기지국을 대형마트, 중계기를 편의점이나 작은 슈퍼라 할 수 있다. 즉, 중계기는 기지국의 신호를 높여주며 소비자가 저렴하면서도 고품질인 통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중계기는 크게 전송매체에 따라 광중계기, 무선통신 (Radio Frequency, RF) 중계기, 광 분산 중계기 등으로 나뉘고, 설치되는 위치에 따라 옥외형, In-Building형, 지하철형 중계기로 나뉜다(Exhibit 4). 경제성과 함께, 기지국 신호의 품질을 유지할 수 있는 기술력, 설치 및 운용과 유지보수의 용이성, 망의 상황에 따라 최적화될 수 있는 제품구성 등이 중계기의 경쟁력을 결정한다(Exhibit 5).

쏠리드의 탄생

창업자 정준과 창업팀

정준 대표는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1986년 미국으로 건너가 1992년 스탠포드 대학원에서 레이저분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일본 히다치 중앙연구소에서 1년 정도 광통신시스템 관련 연구를 한 후 귀국했다. 1994년 선배의 제안으로 한국통신에 선임연구원으로 입사해 한국통신 우면동 연구소에서 1년, 대전 연구센터에서 2년간 근무한다. 그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도 실무를 맡아 일본에서 1년, 국내에서 3년, 총 4년을 광통신 네트워크 관련 연구에 몰두했고, 광통신 전반에 대한 높은 이해력을 갖추게 됐다.

“좋은 아이디어로 시작하는 기업보다 좋은 팀으로 시작한 기업이 더욱 성공확률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디어는 그 수명이 다하는 순간 사업수명도 끝나지만, 좋은 팀은 이러한 아이디어를 계속해서 생산해낼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죠. 저희는 후자 쪽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정준 대표

1997년 말, 스위스와 동구권으로 출장 중이던 정준 대표는 국내에 IMF 사태가 나자 귀국했고, 이후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회사를 운영하면 참 즐겁겠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창업에 대한 꿈을 조금씩 키워갔다. 그러던 중 1998년 초, 실리콘밸리에서 들려오는 중국인들의 성공스토리는 그에게 큰 울림을 던졌고, 구체적으로 창업을 고려하게 됐다. 정준 대표가 사업에 대한 전반적인 구상을 본격화한 건 이때부터다. 그의 대학교 2년 선배인 김종훈 교수와 고등학교 동창인 이인영 이사, 그리고 유학시절 김종훈 교수와 대학원에서 같은 전공을 공부한 이승희 박사, 이렇게 네 명의 뜻이 모아지면서 구상은 실체를 나타내게 된다.

“창업 초기 저, 김종욱, 이승희, 그리고 이인영 이렇게 넷이 주축이 되어 창업을 계획하였습니다. 이인영 이사는 공대를 나오긴 했지만, 엔지니어링 커리어 대신 벤처캐피털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 외의 분들은 모두 엔지니어링 커리어를 쌓았고, 전공분야도 광통신 분야로 비슷했습니다. 저는 KT에서 일하고 있었고, 이승희 박사는 삼성전자 종합기술원에서 연구팀장을, 김종욱 교수는 KT에 있다가 숭실대로 옮겼을 때였어요.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있긴 했지만 핵심 멤버는 이렇게 4명이었습니다.”

– 정준 대표

당시 창업팀 각자는 광통신분야 국내 최고의 전문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소규모의 벤처임에도 초기부터 쏠리드가 적극적으로 선행기술에 대한 투자를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또 그들이 통신회사, 벤더, 벤처캐피털, 대학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궜던 경험은 향후 쏠리드의 성장에 큰 역할을 한다. 특히 창업팀 각자는 개성 있는 역량과 성향이 두드러졌다. 먼저 이승희 대표는 엔지니어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영업분야에서 특히 탁월한 역량을 보였고, 김종훈 교수는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와 이를 통한 문제 해결에 매우 열정적이었다. 이인영 이사는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까다로워 특유의 꼼꼼함으로 초기 쏠리드의 살림살이를 도맡았다. 이처럼 창업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전문적인 역량의 토대 위에, 그들 개개인이 보유한 서로 다른 성향은 큰 자산으로서 향후 성장에 큰 시너지를 만들어 주었다. 또 초기 창업팀 간의 명확한 지분구조와 서로간의 두터운 신뢰는 사업 외 요소에 매몰되지 않고, 각자의 일에 몰두하여 오로지 회사의 미래라는 공통의 지향점을 향해 박차를 가할 수 있게 해줬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저희 창업팀이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깊숙이 보면 관심사나 역량들이 굉장히 달라요. 그렇게 관심분야가 달라도 서로간의 신뢰는 확실했습니다. 예를 들어 각자가 맡은 일만 잘하면 되지 상대방이 혹시 다른 생각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어요. 그래서 일하는 방식은 달랐어도 기본적인 회사 운영엔 문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또 정말 무리한 결정만 아니라면 지지해주고, 항상 존중해주고, 하여튼 그런 면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서로 공헌도가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했던 것을 말하기도 전에 상대방이 먼저 이해하고, 함께 토론하였던 것들, 그런 것들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 정준 대표

또 그는 인재에 대한 욕심도 남달랐는데, 괜찮은 사람을 만나면 당장 같이 일을 추진하지는 못하더라도 꾸준히 모니터링하며 향후 어떤 사업을 진행할 때 그 사람을 어떻게 활용할까 염두에 뒀다. 쏠리드의 현재를 있게 한 R&D 핵심인력인 연구소장 L상무, 전 개발팀장 K박사 등이 대표적인 예다.

“사람에 대한 욕심이 정말 유별나요. 본인이 관심을 갖는 인력들을 꾸준히 관리하는 것 같습니다. 서로간의 꾸준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런 사람들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쏠리드로 들어오는 거죠. 그런 실력있는 인재들은 정준 대표만 보고 오는 거죠. 처음부터 그분들이 할 일이 있어서 들어오는 게 아니라, 들어온 뒤 맞는 일을 찾거나 하는 거죠. 저 역시 정준 대표와 한국통신 연구소에서 함께 프로젝트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정준 대표는 언젠가 함께 일하면 참 좋겠다라고 했고 이후 꾸준히 연락과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후 쏠리드를 창업하면서 합류했죠. 또 초창기 무선통신 팀장이자 지금은 연구소를 맡고 있는 L상무도 저와 비슷합니다. 과거 다른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정준 대표와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로 인연이 되어 지속적인 공을 들여 영입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저희들이 쏠리드에 들어올 땐 정준 대표만 바라보고 왔습니다. 그분의 역량과 가능성, 그리고 인격, 또 지속적인 관심들이 정말 감사했죠.”

– 전 개발팀장 K박사

정준 대표가 R&D팀과 운영인력들을 바라보는 기준은 각각 조금 달랐다. R&D 인력은 기술적인 역량과 지식을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봤고, 개개인의 역량이 전체 R&D팀의 다양한 연구주제에 적절하게 기여할 수 있는가를 최우선적으로 살폈다. 반면 그 외 운영인력들은 기본적인 역량을 토대로 쏠리드의 문화와 얼마나 잘 어울릴 수 있는가를 중점으로 판단했다.

“R&D 인력은 역량에 보다 초점을 두고 바라보고, 그 외의 인력들은 쏠리드와 얼마나 잘 어울릴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두고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런 인력들 가운데에는 그 당시에 저희 회사의 규모로 감당하기 어려웠던 분들도 있었죠. 그래서 직원들의 우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좋은 인력들은 오버헤드 비용이 들어가더라도 나중에 다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회사에 기여를 하더라고요.”

– 정준 대표

창업 초기 통신 장비시장의 현황

초기 이동통신 장비시장은 서비스 가입자가 제한적이었던 1995년 이전에는 크게 형성되지 못했으나, CDMA 방식의 2G 이동통신 서비스 개시 이후, 정부와 이동통신 사업자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투자에 힘입어 매년 큰 폭의 성장을 이뤄왔다. 특히 1996년 6월 PCS 사업자가 선정됨에 따라 이동통신사들이 우수한 통화품질로 가입자를 유치하기 위해 시설투자 경쟁을 벌이면서 1997년과 1998년, 이동통신 장비시장은 급성장했다. 기지국과 중계기 두 부분에서의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기본적으로 휴대폰과 무선 구간을 연결 및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 기지국에 대한 투자는 1990년부터 본격화됐다. 이후 1993년 말에는 전국 74개 시 전역과 107개 읍 및 주요 고속도로 주변지역까지 서비스가 가능하게 되면서 명실상부한 전국 서비스망이 실현됐다. 기지국은 초기 막대한 설비 투자와 기술력이 필요하고 시장규모 역시 그에 상응할 만큼 컸다. 따라서 이를 감당할 수 있는 기업은 국내에서 삼성과 LG 정도였다. LG는 다른 통신 서비스 사업자들과의 경쟁에 놓여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통신 서비스 사업자들은 삼성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에 따라 당시 국내 기지국 시장은 삼성이 독식하는 구조였다. 막대한 초기 투자비용과 기술이 기지국 시장에 높은 진입장벽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자본과 기술력이 부족한 중소·벤처기업들은 사실상 진출이 불가능한 시장이었다.

1996년 10월부터 PCS가 도입되면서, 통화품질이 떨어지는 서비스 음영지역에서도 고품질의 통화서비스를 받고자하는 요구가 증가했다. 이에 따라 저렴한 비용으로 서비스 지역을 넓혀줄 중계기 시장 역시 커져갔다. 그러나 1999년 이후, 이동통신사들의 시설투자가 일단락되면서 중계기 수요는 급격히 감소한다(Exhibit 6).

중계기 업체들은 내수시장의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2001년 중국과 인도 시장 개방을 계기로 적극적인 해외진출을 시도한다. 초기에는 현지 업체들이 CDMA 장비에 대한 개발 능력을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CDMA 분야의 종주국 위치에 있던 한국의 중계기 업체들은 일시적으로 큰 수혜를 받았다. 그러나 가격경쟁력이 탁월한 중국 현지 기업들이 국내 기업들과의 기술격차를 단기간에 따라잡고, 국내 업체들간 과당경쟁이 발생하자 대부분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된다(Exhibit 7). 시장이 장기간 침체되며 이 시기 중계기 업체들의 80%가 사업을 포기하거나 다른 업종으로 전환했다.

창업 아이템 선정

이러한 역동적인 시장 상황 속에서,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1998년 초 한국통신 연구개발본부를 총괄하고 있던 이용경 본부장이 당시 공기업으로는 다소 파격적인 사내벤처제도를 도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창업 시 자본금의 20%까지 출자, 3년 간의 휴직 보장, 그리고 KT의 다양한 리소스를 통해서 회사가 초기 성장을 할 수 있도록 활로를 개척해준다는 내용이었다. 정준 대표에게는 힘이 되는 지원 약속이었다. 이를 계기로 정준 대표는 핵심 창업 맴버들과 함께 그간 계획했던 창업준비를 본격화했다.

“서로 ‘회사를 창업해보자, 창업을 하면 재미있지 않겠냐’ 라는 생각을 했고, 6개월에서 1년 정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98년초 KT에서 진행한 벤처기업육성프로그램에 지원하였습니다.”

– 정준 대표

사업 아이템 선정에 있어서 정준 대표는 위험 부담에 상관없이 가장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을 고집하는 여느 벤처기업들과는 다른 전략을 짰다. 즉 안정적인 매출을 끌어올 수 있느냐를 사업 아이템 선정에서 핵심으로 본 것이다. 이에 따라 쏠리드 창업팀은 현재의 역량을 기반으로 지속적인 매출을 일굴 수 있고, 이를 통해 회사의 안정과 지속적인 투자재원을 확보해서 향후 연관 분야로 사업을 확장할 아이템을 고려했다.

그러던 중 KT에서 중계기에 대한 수요가 커질 것이란 정보를 주었다. 정준 대표는 보유한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기존의 옥외형 중계기가 아니라, 건물 안에 커버리지를 확보해 줄 수 있는 아이템이 향후 성장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을 내린다. 그의 마음을 움직인 중계기의 최고 매력은, 중계기가 이동통신 사업자가 새로운 망 투자를 시작하는 첫 단계부터 다른 장비와 함께 설치되는 아이템이라는 점이다. 즉, 통신 서비스 사업자가 서비스를 시작할 때 기지국을 한번에 전부 설치하는 데는 큰 비용 부담이 있기 때문에, 중계기를 통해 저렴하게 서비스 지역을 넓히는 구조를 택할 것이란 전략이었다. 따라서 사업자가 선택한 이동통신 서비스의 성공 · 실패 여부를 떠나 중계기 산업은 바로 매출을 실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 이동통신 서비스의 진화 방향은 점차 고속의 데이터를 처리하는 장비에 대한 수요로 이어져, 다음 세대의 서비스는 지금과는 또 다른 장비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라는 판단도 작용했다. 이는 분명 새로운 기회를 열어줄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쏠리드는 현재 중계기 시장에서의 니치 마켓(niche market)에서 매출을 확보하고, 새 기술을 기반으로 한 잠재적 시장을 형성한다는 고려하에 창업 아이템을 중계기로 결정했다.

“저는 마지막까지 KT에서 계속 일하고 있었어요. 이승희 대표 같은 경우는 4월부터 사표를 내고 기다리고 있었죠. 특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시기는 7~8월 여름이었습니다.”

– 정준 대표

창업 아이템 선정 이후, 그들은 다시 학생의 자세로 돌아갔다. 1998년 여름을 CDMA와 장비개발에 대한 심도 깊은 공부로 뜨겁게 보냈다. 당시 쏠리드는 단순 생산기술보다는 설계에 방점을 두고 연구를 진행했다. 이는 향후 쏠리드가 단순히 중계기 생산기술에 초점을 맞추었던 기존 기업들과는 다른 행보를 걷게 한 원동력이 된다. 이후 9~10월 KT 심사를 거쳐 11월 초 KT 사내벤처 1호로 선정되고, 1998년 11월 5일, 자본금 수령 후 법인 등기를 발주하면서 쏠리드는 세상에 첫 발을 내디딘다. 창업 당시 인력은 창업팀 4명과 직원 5명 등 총 9명이었다.

쏠리드의 연구개발과 초기 성장

R&D에 기반한 제품개발

쏠리드는 1998년 말부터 1년 여 간 제품개발에 몰두했다. 당시 이미 중계기 업체들은 30여 개에 달했고, 2G에서의 중계기 시장이 옥외형으로는 이미 포화상태에 다다랐기 때문에 정준 대표는 차세대 이동통신 서비스 중계기에 집중했다. 기존 중계기 기업들보다는 시장 진입이 한 걸음 늦었지만, 쏠리드 R&D 인력들의 구성 자체가 다른 중계기 기업에 비해 탁월했고, 정준 대표의 적극적인 R&D투자가 이를 지원하면서 빠르게 차별화된 신제품들을 개발할 수 있었다(Exhibit 8).

그 중 첫 번째로 쏠리드는 대형건물이나 주차장 등에 주로 설치되는 In-Building형 중계기를 개발하였다. 당시 KTF의 In-Building형 중계기는 대응 장비들이 아날로그 전송 방식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는데, 아날로그 대신 광으로 서비스한다면 다른 중계기 업체들보다 큰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쏠리드는 아날로그가 아닌 광으로 연결하는 In-Building형 중계기 개발에 성공했다. 관련 제품으로서는 국내 최초였다. 쏠리드는 이를 KTF에 납품해, 1999년 20억 원의 첫 매출을 이루는 쾌거를 달성한다.

이후 쏠리드는 지하철형 중계기 개발을 통해 매출을 다변화했다. 지하철은 지하 터널, 대합실 등 내부적으로 복잡한 구조라 통신 서비스가 원활하지 못해 소비자들이 불편을 겪고 있었다. 쏠리드는 건물의 각 층과 지하를 서비스하는 In-Building형 중계기를 확대해 지하철에 적합한 설계를 해보면 어떨까 구상했고, 이를 SKT와 협의했다. SKT는 지하철형 중계기의 공급업체로 3개사를 선정하였는데, 이때 쏠리드가 포함되면서, 지하철형 중계기는 2000년 매출을 올리는 효자 상품이 된다. 특히 지하철은 서비스지역 망을 깔 때 모든 지역을 한 번에 설치해야 하는 특징이 있는데, 이 덕분에 쏠리드의 매출은 1999년 20억 원에서 2000년 197억 원으로 10배 가량 도약한다(Exhibit 9).

다음으로 쏠리드는 2001년 소프트웨어 기반 이동통신 시스템(Software Defined Radio, SDR) 디지털 광중계기를 개발하여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다. 디지털 광중계기는 기존의 광 아날로그 전송방식을 디지털로 바꿔 전송하는 방식으로, 쏠리드는 창업 초기부터 이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투자를 진행했다. 가격은 일반 중계기에 비해서 비쌌지만 다양한 기능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훨씬 경제적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당시 2G시장에서는 이미 중계기 납품업체가 대부분 선정돼 공급하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새로운 방식의 디지털 광중계기에 대한 수요가 크지 않아 초기에는 대규모로 사업을 확장할 수 없었다. 이후 이동통신 서비스 시장이 3G로 넘어가면서 쏠리드는 이로 인해 큰 매출을 올리게 된다.

이렇게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와 열정을 쏟아부은 결과, 창업한지 불과 3년 남짓된 쏠리드가 진행하고 있던 모든 방식의 중계기 제품들이 이동통신 서비스 업체들의 납품 자격을 연달아 획득하게 된다. KT로부터는 옥외형 광중계기, In-Building형 중계기, 디지털 광중계기, 지하철형 중계기 4종류를 모두 납품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고, SKT로부터 옥외형 광중계기, In-Building형 중계기, 디지털 광중계기, 지하철형 및 터널형 중계기까지 총 5가지 부문의 납품 자격을 갖추게 됐다.

“R&D 측면에서 보면 2002년은 가장 꽃을 피웠던 시기입니다. 당시 WCDMA 시장이 열리고 모든 시도가 이뤄졌죠. 그 당시 R&D 투자도 가장 많이 했습니다. 생긴지 3년 밖에 되지 않은 쏠리드가 그렇게 많은 부분들을 한번에 모두 얻어낼 것이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이곳 저곳에서 말들이 많았습니다.”

– L팀장(현 연구소장 L상무)

“주변에서 생각하기에 국내 중계기 시장은 이동통신 사업자들이 이끈다고만 생각합니다. 물론 사업자들이 규격을 만들기는 하지만 저희들은 규격을 만드는 일에 함께 참여하였죠. 즉, 다른 중계기 업체들에게는 정해진 규격을 제공하고 끝나지만, 저희 같은 경우는 규격 결정에서부터 함께 참여하면서 직접 제안을 했죠. 그래서 시연회를 열면 항상 저희가 1등을 했습니다.”

– 전 개발 팀장 K박사

연구개발 구성과 R&D 전략

창업 초기인 1999년 R&D 조직은 정준 대표가 평소 거래업체에서 눈여겨 봐 둔 3명의 핵심인력(L, Y, U 팀장)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각각 무선통신, 디지털광통신, 구조설계를 맡아 창업 초기 쏠리드 R&D 전반을 진두지휘했다. 이후 디지털 광통신팀을 맡고 있던 Y팀장이 퇴사하고, 2000년에 영입된 K박사(팀장)가 이를 맡으면서 쏠리드의 R&D 조직은 명확한 체계를 형성했다.

K박사가 들어오는 2000년대 초반부터 쏠리드의 R&D 조직의 구성은 L팀장 소관의 무선통신 팀과 K박사 이하 디지털팀의 두 개 축을 기반으로 구성됐고, 무선과 디지털 쪽에 전반적인 지원을 해주는 구조설계팀은 U팀장이 계속 담당하는 형태였다.

R&D의 전략적 방향 설정에 있어서, 정준 대표는 단순하게 현재의 수요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향후 새로운 기술수요에 대비한 R&D 조직이 될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 전략을 바탕으로 당장의 시장 수요에 맞추는 연구개발은 시스템 설계가 중요한 무선통신팀이 담당하였고, 이보다 앞선 선행기술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는 당시 실험적 성격이 강했던 디지털팀에서 담당하게 하였다. 자원배분에 있어서도 당장의 수익에 기여를 할 수 있는 무선통신팀 쪽에 70%정도를 투입하였지만, 나머지 30%는 보다 선행 기술에 대한 연구개발에 치중하는 디지털팀에 지속적으로 투자하면서 쏠리드는 창업 초기부터 R&D 전략에서 조화를 이뤘다(Exhibit 10, 11). 사실 이처럼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초기 벤처기업이 선행 기술을 위한 연구개발에 초점을 맞춰 따로 자원을 투입하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쏠리드가 기술지향적인 R&D를 놓지 않았던 데는 무엇보다 정준 대표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

“정준 대표 본인이 먼저 연구나 새 것에 대한 욕심이 굉장히 강했습니다. 항상 회의 시간에 Research 강화를 주문했죠. 결국 그 덕분에 선행기술 쪽에 초기부터 꾸준하게 가용 자원의 30% 정도를 투자할 수 있었어요.”

– L팀장(현 연구소장 L상무)

이 전략이 현실적으로 이뤄지기까진 이원화된 조직구조의 공도 있었다. 즉, 무선통신팀에서 In-Building형 중계기, 지하철형 중계기 등의 개발에 성공하였고, 이 영역에서 발생되는 매출로 선행기술적 성격의 디지털팀 투자비용을 메워주면서 안정적으로 기술지향적인 R&D 투자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디지털팀은 꾸준하게 기술을 축적하여 디지털 광중계기와 같은 선행기술을 상업화로 연결해낼 수 있었다.

“만약 초반에 매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선행기술 쪽의 연구를 지속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RF팀에서 꾸준히 매출을 내주었습니다. 사실 디지털부분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매출이 나는 부분이었죠. 결국 완전한 Research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선행기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RF팀이 매출을 꾸준히 내준 덕분이죠.”

– 전 개발팀장 K박사

R&D 전략 실행의 바탕엔 정준 대표를 향한 직원들의 신뢰와 열정이 있었다. 정준 대표는 현재는 중계기기업으로 성장하고 있을지라도, 향후 광통신회사로 변신해 성장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와 별도로 정준 대표의 가치관과 인격에 대한 신뢰는 당시 유능한 인재들을 끌어당겨 그들의 열정을 극대화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당시 젊은 R&D 인력들은 열정과 패기를 바탕으로 일에 몰입하여, 함께 밤을 새는 경우도 부지기수여서 ‘우정철야(友情徹夜)’란 새로운 기업문화를 만들었고, 이는 다양한 신제품 개발에 촉매가 됐다.

“당시에는 기술개발 인력과 영업/기획 인력이 따로 구분이 없었던 듯해요. 저도 기술에 대한 배경지식은 전혀 없지만, ‘나사 죄기’부터 시작해서 연구개발에 필요한 보조업무까지 했습니다. 내 업무가 아니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 뭔가를 같이 해보자는 열정만이 충만했죠. 같이 밤을 새우며 지낸 날이 허다했죠. 그래도 힘들다기 보다는 함께 일하는 행복감이 있었고, 미래에 대한 기대가 막연하지만 굉장히 컸습니다.”

– 전 경영지원팀장 R상무

본격적인 벤처로의 전환

정준 대표의 결단: 1xEV-DO 기지국 시장 진출

“이제는 기술력, 자금력 측면에서 조금 힘을 비축했습니다. 지금까지는 Low Risk, Low Return 전략을 고수했지만 이제부터는 정말 High Risk, High Return에 도전할 때라 생각합니다”

– 정준 대표

정준 대표가 모험을 선언하며 도전하는 아이템은 모바일 데이터통신 전용 기지국장비 ‘1xEV-DO’ 시스템이었다. 1x란 1.25MHz 1채널을 의미하는 주파수 단위로서, 이 제품은 2.5세대의 ‘진화한(EVolution) 데이터전용(Data Only)’기지국 장비를 의미한다. 2000년 7월, 정준 대표는 기존 In-Building형 중계기 기술을 활용하면 기술 개발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또한 중계기 자체만으로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이 정준 대표로 하여금 중계기의 틀을 벗어난 새로운 도전을 갈망하도록 추동했다.

“새로운 서비스가 생기면 그 기반으로 스타기업이 생기죠. 국제적으로 1xEV-DO도 새롭게 연구하고 있었고, 당시 음성이 중심이었던 시장에서 1xEV-DO는 무선데이터를 좀 더 효율적으로 전송하자는 개념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기존의 서비스들과는 성질 자체가 달랐죠. 따라서 우리만이 아니라 기존 기업에게도 새로울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결국 그렇다면 우리도 잘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 스타가 우리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꿈이 있었죠. 정준 대표가 워낙 드라이브를 잘했고, 당시 30명 남짓의 직원들이 보내는 정준 대표에 대한 믿음도 컸죠.”

– L팀장(현 연구소장 L상무)

당시 쏠리드는 SDR 기반의 디지털 광중계기를 상용화할만큼 디지털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고, 기존 기지국 내부에서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아날로그 기반의 장비들을 디지털화해 적용하면 새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1xEV-DO를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그간 디지털 중계기를 개발했던 노하우가 축적돼서 나온 것이었죠. 결국 1xEV-DO도 디지털 중계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 전 개발팀장 K박사

이러한 고민 속에 정준 대표는 야심차게 데이터통신 전용기지국으로 시장 개척의 모험을 결심한다. 그러나 기지국 시장은 당시 쏠리드와 같은 중소벤처기업이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는 기술적 위험부담이 상당히 컸다. 쏠리드는 함께 할 파트너가 필요했다. 마침 정준 대표는 1xEV-DO에 대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던 미국 Airvana사의 창업자 가운데 한 사람인 김대영 박사와 친분이 있었고, Airvana사 역시 1xEV-DO사업의 파트너가 필요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두 회사는 제휴를 맺고, 일사천리로
사업을 진행했다.

“기지국은 중계기업체들에게는 로망입니다. 언제 저쪽으로 가보나, 그런 갈망이 있어요. 솔직히 이동통신장비라고 하면 기지국은 알지만 중계기는 모르니까, 그러던 차에 미국의 Airvana와 연결이 되고, 그렇게 시작됐죠”

– 전 개발팀장 K박사

Airvana사는 미국에서 명망 높은 창투사인 Matrix Partners가 대주주이며, 1xEV-DO장비만을 개발하기 위해 설립된 회사로 이미 시작 전부터 개발자금 1,000억 원을 모아놓고 시작할 정도로 유망한 벤처기업이었다. 또한 Airvana측은 이미 기지국 관련 인력들을 바탕으로 핵심기술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준 대표가 기지국 사업에 도전하는데 있어서 최적격이었다.

Airvana사와 쏠리드의 1xEV-DO 컨셉은 데이터 부(DU)를 하나로 묶고, 광으로 연결하여 안테나 부(RU)를 분리하는 시스템이었다. 즉 무선신호인 RU와 디지털신호인 DU를 분리해서, Airvana측은 DU를 담당하고, 쏠리드는 그간 무선통신에서 쌓아온 기술적 노하우를 바탕으로 이를 광으로 끌고 가는 일을 맡았다. 정준 대표는 비록 코어 역할을 Airvana사에 맡기지만, 이를 통해 기술적인 면에서 한 발 도약해 사업영역을 확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잠재 고객들인 이동통신 서비스사의 반대는 만만치 않았다. 이들은 일단 쏠리드가 기지국 시장에 들어오면 삼성이나 LG 등 대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데, 대기업들은 신사업을 시작하기 1년 또는 그 이전부터 기획·영업 등을 체계적으로 준비하기 때문에, 벤처기업인 쏠리드가 상대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 우려했다. 또 통신 서비스회사가 장비 구매 시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게 첨단 기술력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서비스 불량이 생길 때 신속히 대응할 수 있다는 신뢰성과 공신력이 더 중요했기에, 그들은 중소·벤처기업보다는 대기업을 선호했다. 설사 삼성보다 더 좋은 제품을 개발하더라도 기지국 시장에서 경쟁자간 수준이 절대적으로 달라서 삼성을 밀어내긴 어려운게 당시 기지국 시장의 생리였다.

외부의 우려뿐 아니라 내부 조직 배치의 문제도 있었다. 즉, 신사업인 기지국 사업은 새로 수혈된 인력 주도로 진행하겠지만, 무선이나 구조설계 부분은 기존 무선통신팀에서 인력을 충당할 수밖에 없을 테고, 이럴 경우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매출구조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불안감이 팽배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지국 시장의 마켓리더가 삼성이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았죠. SKT, KTF에 제안서를 내면 대부분 굉장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플레이의 수준이 다르다는 이유가 컸습니다. 또 내부에서도 반대가 있었죠. 이건 집토끼/산토끼 개념 같은 것인데, 기지국은 상당부분 새로 수혈된 사람들이 리딩을 하지만, RF나 구조설계 부분은 결국 집토끼가 하는 거죠. RF팀의 L상무 밑에 있던 핵심인력 몇 명이 기지국 프로젝트로 딸려 들어갔죠. 그래서 산토끼 찾다가 집토끼 놓치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었죠.”

– 전 경영지원팀장 R상무

정준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1xEV-DO는 3G기반의 이동통신이 WCDMA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임시 가교 역할을 할 것이며, 기존 기지국시장의 대기업들은 1xEV-DO보다는 WCDMA에 더 초점을 맞춰 연구개발과 투자를 진행할 것이라 판단했다. 또 당시 이동통신 서비스 회사들이 기지국 시장에서의 삼성 독식을 견제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쏠리드는 In-Building형 중계기, 지하철형 중계기를 통해 매출기반과 역량을 확보하였기에, 기지국 시장 진입을 시도해 볼만한 내부역량을 갖고 있단 자신도 있었다. 특히 기존의 사업영역인 중계기보다 더 높은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기지국 시장으로의 진입에 대한 직원들의 열망은 내부의 우려를 압도했다. 기지국 시장으로의 사업영역 확장에 두려움보다 기대감이 가득했던 이유다.

“이제는 위험을 감수하며 갈 수밖에 없습니다. 위험부담 없이 안정적으로만 가서는 기업을 키울 수도, 또 큰 성장을 기대하기도 힘들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쏠리드는 진짜 벤처 비즈니스를 시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정준 대표

그러나 기지국 시장여건은 정준 대표가 예상하던 것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SKT, KTF 등 이동통신 서비스 회사들이 IMT-2000에 근접한 3세대 서비스 투자를 전면 보류하는 대신, 데이터통신 서비스를 강화할 수 있는 2.5세대의 1xEV-DO 기지국을 확대하기로 투자궤도를 전면 수정한 것이다. 이로 인해 기지국 시장에서 삼성전자를 비롯한 대기업들은 본격적인 의미의 3G인 WCDMA 장비개발을 전면 보류하고 1xEV-DO 장비 개발에 뛰어들었다. 삼성 등 대기업을 피하면서도 좀 더 높은 차원의 이동통신 장비시장에 진출하겠다는 정준 대표의 꿈은 삼성전자, LG전자 등 쟁쟁한 통신 장비업체와 정면승부해야 하는 상황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기존 기지국 기업과의 경쟁에서 쏠리드가 불리했던 이유가 또 있다. 기존 기지국 기업들은 이미 자사 기지국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기지국 내부의 채널카드 업그레이드를 통해 비슷한 서비스를 구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비용 면에서 굉장히 유리했다. 그러나 기지국을 보유하지 못한 신규 진출 기업인 쏠리드는, 기존 기지국을 활용하는 것과는 다른 기술적 방향을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쏠리드는 Data를 위한 별도의 기지국을 따로 설치해 Data망과 Voice망의 분리를 주장했는데, 이는 기술적인 면에서 기존의 방식보다 더 뛰어났지만, 비용적인 면에선 불리했다(Exhibit 12).

결국 쏠리드는 비용에 대한 부담을 극복해내지 못했다. 기술력에 대한 자신감이 충분했지만, 문제는 비용이었다. 쏠리드가 테스트용 제품을 납품하며 기지국 시장진입의 희망을 꽃피워 온 KTF가 기존 기지국 기업들이 제시했던 채널카드를 업그레이드하기로 하면서, 쏠리드는 2002년 기지국 사업에서만 30억 원에 가까운 손실을 보게 된다. 거대한 시장 여건에 열정과 기술력으로 승부하려던 쏠리드가 무릎을 꿇은 것이다.

유휴인력에서 핵심인력으로: 위성 DMB용 중계기 개발

기지국 시장에서의 패배를 확인하자마자, 쏠리드는 빠르게 시장에서 퇴거했다. 정준 대표의 결단력이 돋보이는 결정이었다. 판단은 빠르고, 시기 적절했다. 문제는 기지국 사업을 위해 뽑은 인력들이었다. 그는 ‘사업전략에 맞추어 인력관리를 하지 않고, 인력에 맞추어 사업전략을 수립 실행해야 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그들을 품었다. 이들은 향후 쏠리드가 위성 DMB용 중계기라고 할 수 있는 Gap Filler의 개발을 통해 한 단계 더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저희가 Gap Filler를 가장 먼저 만들었죠. 일단 저희의 경우에는 이를 만들 수 있는 인력이 있었어요. 기지국을 다뤘던 인력들이었죠. 사실 다른 중계기 기업들은 이런 것을 다뤄본 기업들이 거의 없었어요. 그게 가장 먼저 개발할 수 있었던 힘이 됐죠.”

– 정준 대표

2003년 SKT는 자회사인 TU미디어를 통해 DMB 서비스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DMB 서비스는 기존의 오디오 방송은 물론 TV와 같은 영상방송, 기후, 교통정보, 뉴스 등의 다양한 데이터 정보를 제공하는 서비스다. DMB는 전송 수단에 따라 위성 DMB와 지상파 DMB로 나뉘는데, 위성 DMB는 2004년 SKT와 일본 MBCo가 공동 제작해 발사한 DMB 위성 ‘한별’을 이용하며, 지상파 DMB는 지상에 있는 기지국과 중계기를 통해 송출됐다.

위성에서 신호를 쏘는 위성 DMB는 전국에서 커버가 가능하지만 위성신호가 들어가지 않는 서비스 음영지역이 발생하는 문제가 생겼고 이를 해결하는 게 중요한 과제로 대두됐다. 쏠리드는 DMB 서비스 신호를 서비스 음영지역에 뿌려주는 장비인 ‘Gap Filler’개발을 시도했다. Gap Filler는 CDMA 통신망에서 기지국과 별도로 설치돼 지하 구간, 건물 밀집지역 등의 음영지역을 해소해주는 중계기와 같은 역할을 수행해 위성 DMB용 지상중계기로도 불린다(Exhibit 13).

그러나 Gap Filler는 기존 중계기와 달리 위성을 통해 전달받은 신호의 포맷을 전환해 적절한 신호로 다시 단말기로 보내야 하므로 기술적으로 어려웠다. 특히 당시 Gap Filler개발은 세계 최초라 기본 척도가 되는 계측기가 없어 시작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쏠리드는 Gap Filler개발 이전에 직접 계측기 개발을 해야 했다. 이 계측기 개발은 위성신호와 같은 기본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진행되는 것이기에 쉽지 않았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쏠리드는 쌓아온 기술력과 기지국 설계에 참여했던 뛰어난 인력을 바탕으로 계측기 개발에 성공했다. 또 그들이 직접 개발한 계측기를 통해 위성 DMB용 중계기 Gap Filler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내는 쾌거를 이룬다(Exhibit 14).

“정말 세계 최초라는 게 어렵다는 걸 알았어요. 단순하게 시험용 위성신호와 스펙문서만을 보고 가는 상황이었는데, 시장도 없고 계측기도 없고, 고생 많이 했죠. 특히 무엇을 만들려면 계측기가 있어야 해서 계측기 개발에 많은 공을 들였죠. 이후 저희가 계측기를 개발해서 다른 기업들에게 공급해 주었죠.”

– 전 개발팀장 K박사

이러한 성공의 밑바탕엔 그간 무선통신과 디지털을 연구했던 노하우와 기지국 설계 사업을 담당했던 인력들이 있었다. 여기에 통신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L박사를 영입하면서 위성 Gap Filler개발은 순풍에 돛을 단 듯 술술 진행된 것이다.

“특히 L박사가 큰 역할을 했죠. 그 분께서 Gap Filler의 통신알고리즘에 대한 정보를 갖고 저희를 진두지휘하셨죠. 분명 어려움도 있었지만 세계최초 Gap Filler 개발이 그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던 덴 그 분의 공이 컸어요. 사실 그 분도 정준 대표가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했던 분이라고 알고 있어요. 물론 Gap Filler개발을 위해 합류하신 건 아니었지만, 와서 보니까 그분께 적합한 프로젝트가 Gap Filler개발이었죠.”

– 전 개발팀장 K박사

고객사들 역시 쏠리드가 그간 디지털 광중계기 세계 최초 개발과 기지국 시장 진출 등을 통해 보여준 무선통신과 디지털 등 기술력에 신뢰를 보냈다. Gap Filler개발은 2004년 쏠리드의 꾸준한 성장에 견인차가 된다. 당시 쏠리드의 주요 제품이었던 CDMA 중계기의 망에 대한 설치가 대부분 완료되며 매출이 떨어졌고, 이는 자칫 회사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때 Gap Filler를 통해 새로운 매출이 발생했고, 결국 쏠리드는 Gap Filler개발을 통해 고공 성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Exhibit 15).

3G 시장의 도래: WCDMA를 통한 도약

쏠리드는 2G 이후 다가올 3G 시장에 다른 기업들보다 한발 앞서 대응했다. 당시 3세대 이동통신으로 기대되던 IMT-2000이 이동통신발전에 큰 변화를 몰고 오며, 유럽식 GSM의 발전 모델인 WCDMA가 향후 대세가 될 것이란 기대로 전 세계가 큰 투자를 감행했다. 국내도 마찬가지였다. 쏠리드도 이동통신 서비스가 WCDMA로 바뀌는 시기에 새로운 기회가 올 것이라 봤다. 특히 쏠리드는 2G 시대인 CDMA 중계기 시장에서 후발주자였기에, 기존 업체들이 대부분의 시장을 확보하고 있었던 상황에 맞서 In-Building형 중계기, 지하철형 중계기 등 특수 제품으로 시장을 개척하는 우회 전략을 택해왔다.

그러나 3G 기반의 신기술인 WCDMA로 시장이 전환되면 기존 중계기 업체들과 동일선상에서 새롭게 경쟁할 수 있어, 기술력만 확실하다면 충분히 승산있는 게임이라고 봤다. 또 쏠리드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디지털 광 중계기에 대한 수요가 2G 시장에서보다 3G 시장에서는 클 것이라 판단했다. 결국 쏠리드는 떠오르는 WCDMA 시장에서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해 2000년대부터 R&D 인력 절반 가까이를 WCDMA용 중계기 개발에 투입했고, 2002년 개발에 성공했다. 다른 중계기 업체들과 차별화된 다양한 경험과 선행기술을 확보한 점이 결정적이었다. 쏠리드는 SKT와 KTF의 공식 납품업체로 선정됐다. 그간 쏠리드의 여러 도전들이 헛되지 않았음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보통 이동통신 사업자들의 망 투자는 서울, 경기, 광역시, 그 다음 전국 망 설치로 이동하면서 단계적으로 진행한다. 중계기의 경우, 기지국과 함께 광중계기를 설치해 옥외 커버리지를 확보하고, 대형 건물이나 가입자가 많은 곳을 중심으로 In-Building형, 지하철형 중계기를 설치한다. 이후 무선통신 중계기를 통해 단계적으로 커버리지를 확보해 나간다. 이처럼 지역별, 서비스 영역별로 진행되는 순차적인 망 투자 덕분에 쏠리드는 SKT와 KTF의 WCDMA용 중계기 납품 업체로 선정된 이후 몇 년간 지속적으로 매출을 내며 안정적인 성장을 일궈낸다.

새로운 성장을 위하여

2005년 7월 쏠리드는 코스닥 상장을 한다. 이후 SKT와 KTF 두 회사에서 WCDMA 망에 대한 투자를 파격적으로 늘리며 쏠리드의 매출이 폭증한다. 쏠리드의 모든 조직이 밀려드는 고객사들의 주문에 맞춰 제품을 최적화하고 공급하기에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다. 창업 초기부터 공을 들여왔던 R&D에 대한 투자가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지만,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정준 대표의 머릿속엔 많은 생각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R&D는 3개 정도의 Layer가 있는 것 같아요. 우선 제일 표면적인 R&D는 기존에 보유한 기술로 고객이 필요로 하는 제품을 구성하고 그걸 조금 응용해 효율적으로 싼 제품을 만드는 개발적 성격의 R&D예요. 중간 정도 R&D는, 완전한 원천 기술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최종 제품의 최적화에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 그런 기술 연구로 볼 수 있어요. 이런 기술은 다양한 응용영역으로 확장이 가능해 여러 형태의 제품 개발을 해내죠. 마지막으로 제일 근본적인 R&D는 원천 기술에 가까워서 실질적으로 상업성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 자체로 새로운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는 꼭 필요한 부분이지만, 기업 입장에서 추진하기는 쉽지 않아요.”

– 정준 대표

창업 초기부터 쏠리드는 명확한 전략적 R&D 방향을 제시했다. 즉, 시장중심적인 개발과 기술중심적인 연구, 둘 모두에 조화롭게 투자하면서 안정적으로 이동통신 중계기 시장에 진입한 것이다. 이 투자는 초기 In-Building형, 지하철형 중계기를 시작으로 디지털 광중계기, WCDMA용 중계기 개발로 이어졌다. 이후 쏠리드는 기술중심적인 R&D에 더 적극적으로 투자하며, 보다 앞선 기술력을 요하는 1xEV-DO 기지국 시장진출을 시도했다. 이는 위성 DMB용 Gap Filler개발로 이어져 지속적인 성장 그래프를 그려낸다. 정준 대표 자신의 표현대로 중간 정도의 R&D에 초점을 맞춘 시기였다. 연구개발에 대한 초기 노력은 3G시대의 국내 중계기 시장을 석권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시장이 본격적인 성장기에 들어가면서 주문이 폭증하고, 사업자들의 다양한 요구에 맞춘 제품을 만들면서 R&D의 초점도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즉 R&D 방향 자체가 Research보다는 Development에 역점을 두어 정준 대표의 표현대로 제일 표면적인 연구개발에 치중된 것이었다. 매출이 폭증하며 제한된 R&D인력자원이 급증하는 수요에 맞춘 개발에만 몰입하는 역설이 생긴 것이다.

“창업 초기, 그 당시는 정말 저희가 앞선 기술을 많이 시도해 봤어요.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쪽에 많은 도전을 했죠. 몇몇 제품의 경우 저희들이 개발을 하고 나서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상용화가 됐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2000년대 초반은 제가 말씀드린 R&D layer에서 중간 단계였던 것 같아요. 이후 Gap Filler와 WCDMA 같은 큰 시장이 열리면서 고객들의 요구에 맞추어 장비를 개발하여 파는 데에만 너무 바빠졌어요. 가령, 연구개발의 가장 밑단에만 겨우 초점을 맞추었던 거죠.”

– 정준 대표

이런 상황은 정준 대표에게 쏠리드의 R&D 방향 설정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던졌다. 창업 초기와는 확연히 달라진 현재 위상에서, R&D 전략 수정은 불가피했다. 이는 향후 10년 뒤 쏠리드가 빠르게 진화하는 통신시장에서 도태되지 않고 생존하기 위한 근본적인 고민이었다.

Exhibit 1. 이동통신 기술진화

출처: 한국전자통신연구원(2011) 리포트를 참조하여 재구성

Exhibit 2. 기지국 통신원리

출처: 통신이야기

Exhibit 3. 이동통신망과 중계기 연결구조

출처: 모바일 트래픽: 통신망의 진화가 시작된다, 삼성증권, 2011. 02.

Exhibit 4. 중계기 종류

출처: 쏠리드

Exhibit 5. 중계기 사업의 Value Proposition

출처: 쏠리드

Exhibit 6. 초기 중계기 시장 추이

출처: 정보통신산업협회(2003) 리포트를 참조하여 재구성

Exhibit 7. 초기 국가별 중계기 수출 실적

출처: 한국무역협회, 2005.

Exhibit 8. 쏠리드 연혁

Exhibit 9. 쏠리드 전체 매출액 추이 및 매출 대비 R&D 투자 비율

(단위: 억 원)

출처: 쏠리드

Exhibit 10. 창업 초기 쏠리드 조직도

Exhibit 11. 쏠리드 창업 초기 인력구성

(단위: 명)

Exhibit 12. 이동전화 기지국 내부 형상

출처: SK네트웍스

Exhibit 13. Gap Filler 구조

출처: TUmedia(http://isponge.tistory.com/509), 2006. 05.

Exhibit 14. 지하철에 설치되어 있는 Gap Filler

출처: 위성 DMB Service, 세티즌(www.cetizen.com), 2015. 01.

Exhibit 15. 2002~2004년 매출구성 & 2004년 분기별 매출구성

(단위: 백만 원)

출처: Maket Scout, 푸르덴셜증권, 2005.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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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진

이상명

이상명

이상명 교수는 한양대학교에서 경영전략과 벤처, 그리고 기업가정신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인생의 바른 길을 찾기 위한 지독한 성장통을 온몸으로 경험한 후, 삶의 길을 돌고 돌아 경영학 교수가 되었다. 혁신과 IT, 그리고 경영전략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하였다가, 구도자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경영자들의 철학과 기업가적 마인드에 매료되어 최근에는 사람 공부와 바른 사회를 위한 경영의 역할에 대한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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