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 폐쇄 후 공급사슬 재구축 및 새로운 생산기지 선정 전략 – 진글라이더

진글라이더는 송진석 대표가 1998년에 설립한 패러글라이더 제조 기업이다. 설립 당시부터 90% 이상의 제품을 수출하고 있으며, 우수한 제품력을 기반으로 세계시장점유율 1위를 꾸준히 유지해 왔던 히든 챔피언기업이다. 2016년 2월, 대한민국 정부가 개성공업지구(이하 개성공단)를 폐쇄함에 따라 진글라이더는 공급사슬의 단절(supply chain disruption)로 설립 이후 가장 심각한 경영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진글라이더는 생산 능력(preduction capacity)이 60% 이상 떨어졌으며, 개성 공장에 원자재 및 완제품을 그대로 두고 철수하면서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입었다. 무엇보다도 진글라이더의 위기 속에서 진(珍)에 충성도가 높은 고객들이 경쟁사 제품으로 이동한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우수한 제품력과 더불어 규모의 경제를 기반으로 생산의 효율성을 제고한 경쟁업체 오존의 급부상은 진글라이더의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

이렇게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서 진글라이더도 더 이상 제품개발 중심의 전통적인 운영방식을 고수하며 공급사슬 시스템의 비효율성을 감내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특히 제품의 차별화를 통해 높은 수익성을 얻기는 점점 더 어려운 환경으로 가고 있다. 이에 진글라이더는 단기적으로는 개성 공장 폐쇄로 인해 상실한 생산 능력을 회복하고 단절된 공급사슬을 복구해야 하며, 중장기적으로는 수요가 가장 큰 보급형 제품들의 가격경쟁력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Q1. 노동집약적 성격이 강한 제조업 진출 기업들은 중국, 동남아시아, 중남미, 동유럽 등 인건비가 비교적 저렴한 지역에 공장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기업이 해외에 생산기지를 운영할 때는 현지에 있는 다양한 위험 요인을 식별하고 관리해야 한다. 진글라이더 개성 공장의 위험 요인들을 평가하고, 이를 기반으로 위험 요인들을 관리하기 위한 방안들에 관하여 논의하시오.

Q2. 2016년 초 개성 공장 폐쇄로 인해 진글라이더는 생산 능력이 70% 이상 감소되는 심각한 상황에 처한다. 2016년 판매 시즌과 총판의 기존 주문량에 대한 진글라이더의 생산능력 부족 문제를 즉시 해결하기 위한 대처 방안들을 제안하시오.

Q3. 이전 수준으로 사업이 정상화될 것이라는 전제하에 진글라이더는 새로운 제조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최근 중국에 이어 베트남, 라오스, 인도네시아 및 아프리카 등이 제 3의 역외가공 지역으로 관심을 받고 있다. 장기적 관점에서 경쟁력 향상과 공급사슬 시스템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진글라이더가 어느 지역에 제조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효과적일지 논의하시오.

Q4. 패러글라이딩 산업의 게임의 법칙이 변하고 있다. 경쟁업체들의 기술 수준이 높아져 그동안 성능이 우수한 제품을 기반으로 고부가가치를 창출했던 진글라이더도 기존의 전략을 고수하기 어려운 환경이 돼 가고 있다. 따라서 비용 절감 및 프로세스 개선 등을 통한 경쟁력 확보가 필요하다. 이러한 시장 변화에 대응하여 진글라이더가 장기적으로 어떠한 성장 전략을 취할 수 있는지 자유롭게 토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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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폐쇄 후 공급사슬 재구축 및 새로운 생산기지 선정 전략1) – 진글라이더

개성공단의 폐쇄

2016년 설 연휴 마지막 날인 2월 10일, 진글라이더의 송진석 대표이사(이하 송진석)는 일본의 후지산 자락에 있었다. 늦겨울과 초봄 즈음 후지산 일대는 공기가 건조하고 청량한 날이 많아 햇볕을 머금은 지열이 상승기류를 유발하여 패러글라이딩을 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후지산과 고즈넉이 연결된 해발 1,000미터의 아사기리 고원에서 패러글라이더를 이륙시켜 상승기류를 타게 되면 눈 덮인 후지산과 어우러진 대자연의 신비함과 웅장한 비경(祕境)을 감상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기상 조건으로 후지산은 아시아 최고의 패러글라이딩 명소로 세계 각지의 마니아들뿐 아니라 수많은 아마추어 동호인들을 유혹해왔다.

설 연휴임에도 불구하고 송진석이 아사기리를 찾은 이유는 2016년 시즌을 대비한 신제품들을 테스트하기 위해서였다. 2009년부터 세계선수권대회(Paragliding World Championship)와 월드컵(Paragliding World Cup)에서 오존(Ozone)사의 패러글라이더 ‘엔조’가 대부분 우승을 차지한 상황에서 진(珍) 브랜드의 명성을 되찾을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수한 제품을 개발해 다시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는 것이다. 이에 진글라이더의 모든 구성원들은 최고 성능의 신제품을 개발하는 데 사운(社運)을 걸고 있었다. 한국의 겨울 산은 상승기류가 많지 않고 바람의 방향을 예측하기 어려워 송진석은 신제품들의 최종 테스트 장소로 아사기리를 선택했다. 송진석은 2016년 시즌에 선보일 ‘스프린트3’의 막바지 시험비행을 하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모든 일정이 순탄하게 진행되어 테스트가 마무리되어 가던 오후 3시경, 송진석은 개성 공장의 직원으로부터 긴급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설 연휴라 개성 공장에는 당직을 서는 한국 직원 한 명만이 머물고 있었다. 전화기를 통해 당직을 서고 있는 직원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큰일났습니다. 개성공단에서 당장 철수하라고 합니다. 정부가 오늘부로 개성공단을 폐쇄한다고 합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도 또 이런 일이……!”

당일 2시경에 개성공단관리위원회가 긴급회의를 소집했고, 회의를 통해 정부의 개성공단 폐쇄 지시가 입주 기업들에 전달되었다. 오후 5시에 정부가 개성공단 폐쇄를 공식 발표하기 전, 개성공단에 남아 있는 한국 직원들은 짐을 빼서 당장 철수하라는 통보였다. 불안한 예감은 항상 틀린 적이 없다. 지난 1월 북한이 실시한 핵 실험과 2월 7일 발사한 광명성 4호기가 결국 문제가 되었다.

다음날인 2월 11일, 정부는 제한된 인원에 대해서만 방북을 허용했다. 중요 서류와 데이터베이스 등 핵심 물품을 반출해오라는 것이었는데, 같은 날 북측이 공단에 잔류하던 대한민국 근로자 전원 추방 및 자산동결을 선언함으로써, 개성에 남아 있던 우리 기업의 직원들은 개인 소지품마저 챙기지 못하고 군사분계선을 넘어야 했다.

송진석은 허탈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3년 전에도 북측에 의해 4달여 동안 강제로 공단 가동이 중단된 바가 있었다. 이후 우리 정부와 북한은 수차례의 협상을 통해 입주 기업들이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어떠한 경우에도 정상적인 운영을 할 수 있도록 공단의 독립성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그 약속을 굳게 믿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됐지만, 개성에 머물고 있는 직원의 안전과 2016년 시즌을 위한 대책 마련이 더 시급한 문제였다. 3월이면 시작되는 시즌을 위해 사전 제작한 상당량의 완제품과 반제품을 개성공단에 쌓아둔 상태였지만, 공단이 폐쇄된 상황에서는 당장 이번 달에 딜러들이 주문한 제품들조차 납품할 방법이 없었다. 또다시 회사의 신용은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고, 진글라이더의 불운이 경쟁사들에는 호기가 되어 진의 시장점유율을 갉아먹을 것이다. 송진석은 귀국 준비를 서두르며 비상회의를 소집하라고 본사에 지시했다.

송진석 대표의 기업가 정신

행글라이딩이 대한민국에 도입된 것은 1975년경이고, 송진석은 대학교 재학 중이던 1977년에 처음으로 행글라이딩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행글라이더 완제품이 정식으로 수입된 것은 아니었고, 평소 비행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민간인들이 외국 항공잡지에 실린 행글라이더 사진을 본떠 복제품을 제작하면서 우리나라 행글라이딩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행글라이더의 양력(揚力)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설계가 이루어지고 활공(滑空)의 안전성도 고려되지 않은 조잡한 행글라이더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된 행글라이딩은 하늘을 동경하는 청장년들을 중심으로 동호인층이 점진적으로 증가했고, 이들 가운데 송진석이 있었다. 당시를 회고하는 송진석의 얼굴은 젊은 날 느꼈던 처녀비행에 대한 흥분에 젖어들고 있었다.

“원래 행글라이더부터 시작했어요. 당시의 행글라이더는 대부분 불량 복제품으로, 추락하는 것도 많았고 조종사가 사망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말 똑똑한 것 같습니다. 청계천에 헌책방들이 줄줄이 있었잖아요? 거기서 외국 잡지에 실린 행글라이더 사진들을 보고 디자인을 한 겁니다. 사진에 나와 있는 사람의 키가 이 정도이니 날개의 폭과 길이가 어느 정도일 거라고 추측해서 설계를 해요. 그런 다음 혼자서 두들겨서 프레임을 만들고 방산시장에서 산 원단을 양장점에 맡겨 재봉틀로 가공을 했으니 얼마나 무지한 거예요. ‘아야지2)’라고 텐트나 천막을 만드는 원단이 있습니다. 그걸 가지고 행글라이더를 만들어서 뚝섬에서 비행을 했던 거예요. 처음에는 ‘이 사람들 미치광이들 아닌가?’ 했습니다.”

이렇게 조잡한 수준의 행글라이딩이 한 단계 도약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1979년 여수 화학공단에 엔지니어링 슈퍼바이저로 와 있던 호주인 기술자가 송진석과 친구들에게 함께 비행을 하자고 제안 한 것이다.

“자기가 행글라이더를 타는데 같이 비행을 해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만나 보니 이 사람이 가져온 행글라이더는 알루미늄 파이프도 번쩍거리고 날개도 번쩍거리고, 이건 뭐 상상을 초월하는, 완전히 비행기 같은 행글라이더인 거예요. 그 당시 우리는 한번 타면 기껏해야 50~60초 정도 비행을 했어요. 그때 저의 최고기록이 1분 10초였어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비행이라고 부르기도 가당치 않고 그냥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이 전부였죠. 그런데 이 사람의 행글라이더는 날개가 마치 독수리처럼 날카롭게 빠졌고, 알루미늄 프레임에 계기판이 달려 있더라고요. 그게 바로미터(barometer: 기압계)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죠. 글라이더가 상승하거나 하강하면 소리도 난대요. 이건 뭐 엄청 신기하잖아요? 우리는 일단 뜨고 나면 하강을 하는데, 이 사람은 뜨더니 회전하면서 상승을 하는 거예요.”

송진석과 친구들은 그와 같은 기종의 행글라이더를 구입해서 곧바로 분해를 해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행글라이더가 보다 과학적으로 제조되기 시작했고, 송진석도 이때부터 글라이더 디자인과 제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송진석의 부모님은 이 위험한 취미생활을 반대하셨다. 송진석은 대학에서 조선공학을 전공했는데, 내과 의사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전공을 살려 엔지니어의 길을 걷기를 바랐다. 든든한 후원자였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송진석은 마음을 잡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한다. 하지만 순탄한 삶은 송진석의 운명이 아니었다. 현대중공업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행글라이더와의 인연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회사 본부장이 창립기념일 체육대회를 위해 돋보일만한 이벤트를 준비하라고 지시했고, 송진석은 엔진으로 추진되는 동력 행글라이더를 전 직원들 앞에서 선보이게 된다. 레저스포츠 관련 기술에 관심이 깊었던 당시 정몽준 상무는 바로 눈앞에서 펼쳐진 행글라이더쇼에 매료되었다.

정몽준 상무의 관심과 후원에 힘입어 송진석은 1983년 독일에서 열린 행글라이딩 국제대회에 선수로 출전했다. 송진석에게 공식 대회 참가 경험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송진석은 세계 45개국에서 모인 젊은이들의 행글라이더에 대한 열정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경험한 후, 행글라이더에 인생을 걸어볼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이 서른 즈음에 결단을 내렸다. 하늘을 비행하며 사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며 과업이라고 인정하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홀가분했다. 송진석은 1985년 현대중공업을 퇴사하고 행글라이딩의 천국인 독일 뮌헨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일주일에 나흘은 행글라이더 제조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며 설계와 제조 기술을 배웠고, 나머지 사흘은 유럽 각지의 하늘을 활공하는 방랑자 생활을 했다. 약 5년간의 독일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려던 차에, 같은 업계에서 일하던 독일인 친구가 툭 던진 한마디가 그의 인생 방향을 다시 틀어버렸다.

“한국에 돌아가면 패러글라이더를 만들어보지 그래?”

당시는 행글라이더에 낙하산의 원리를 접목한 패러글라이더가 개발되어 빠르게 보급되던 때였다. 송진석은 대학에서 전공한 조선공학과 행글라이더 제작 경험, 행글라이더를 타면서 얻은 지식 등이 패러글라이더를 제작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남과 북의 대치로 인해 주요 군수물자인 낙하산을 제조할 수 있는 고급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고, 저렴한 인건비에 세계적인 봉제기술을 지닌 인력도 있었다. 송진석은 자신이 패러글라이더를 제작하지 못할 이유가 없겠다 싶었다. 오히려 대한민국이 패러글라이더 제작에 가장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나라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1987년,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송진석은 지인들과 의기투합해 에어맨(Airman)상사라는 패러글라이더 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일본 유피(UP: UP paraglider)사로부터 초기 자금을 투자받아 일본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을 통하여 OEM 방식으로 패러글라이더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제작한 패러글라이더가 세계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에어맨상사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91년 프랑스에서 열린 제1회 패러글라이딩 월드컵대회에서 유피의 패러글라이더가 최종 우승 후보에 오르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성과는 송진석을 당혹스럽게 했다. 당시 유피와 함께 최종 우승을 다투던 패러글라이더가 우리나라 기업이 제작한 ‘에델’이라는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유피는 일본의 자금과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제품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에어맨에서 만든 유피를 응원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유피의 성공은 오히려 날카로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송진석과 가까운 사이였던 당시 대한항공협회 김진영 이사마저도 송진석에게 ‘일본 좋은 일만 시킨다’고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유피와 에델의 대결 구도는 송진석에게 우리나라에서 패러글라이더 사업을 이끌어가려면 고유의 브랜드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이에 송진석은 ‘made in Korea’ 패러글라이더를 세계 최강의 제품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1992년 송진석은 에어맨상사를 정리하고 에델을 개발한 대교엔터프라이즈(당시 서성준 대표)에 입사했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 그는 대교의 제품개발팀에 근무하며 독보적인 패러글라이더 디자이너 겸 개발자로 활약하는 한편, 세계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패러글라이더 선수로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대회에 참여하며 극한의 환경에서 비행하는 선수들의 여건을 고려해 제품의 성능을 다양한 각도에서 평가하는 동시에, 약점을 개선하기 위해 항상 노력했고, 이를 기반으로 우수한 패러글라이더를 제작할 수 있었다. 송진석은 패러글라이딩에 대한 실전 중심의 철학을 바탕으로 신제품 개발이 완료되면 제품의 성능과 안정성을 직접 테스트하고, 품질 및 성능 개선을 위해 앞장섰다.

“디자인 설계도 중요하지만 컴퓨터 프로그램으로는 에어의 움직임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필드에서의 실전 테스트가 중요하죠.3)

이후 송진석이 제작에 참여한 대교의 에델은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회사의 매출도 함께 성장했다. 이렇게 제품 디자이너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다시 한 번 큰 변화가 찾아온다.

1997년 대한민국을 강타한 외환 위기는 레저 산업 전체에 직격탄을 날렸다. 항공레포츠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교의 재무구조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급기야 송진석이 소속되어 있던 제품개발팀이 구조조정으로 해체되고 만다. 대교의 경영진이 제품 생산은 계속하되 제품 개발은 일시 중지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송진석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예기치 못한 외부환경의 변화로 직장을 잃은 송진석은 커다란 상실감과 좌절감에 빠졌다. 30대 청춘을 모두 패러글라이더 개발에 바쳤지만,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패러글라이더 디자인에 열정을 바쳤던 젊은 개발자들과의 인적네트워크가 전부였다.

어려운 시기에 송진석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또다시 일본 기업이었다. 평소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일본의 한 딜러가 당장 세계대회에서 성적을 올릴 수 있는 고성능의 선수용 패러글라이더를 제작해달라는 주문과 함께 2,000만 엔의 선수금을 보내온 것이다. 그리고 평소 패러글라이딩 마니아였던 성도어패럴 최형로 회장이 자신이 소유한 용인연수원 건물의 일부를 빌려줄 테니 사업을 시작해보라고 했다. 이를 계기로 1998년 송진석은 본인의 이름을 딴 진(珍)글라이더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창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송진석은 창업 초기부터 신제품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 이유는 세계대회에서 우승하는 패러글라이더 브랜드가 궁극적으로 동호인들이 선호하는 브랜드가 된다는 산업의 생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개발하고자 하는 제품은 당장 대회에 나가더라도 우승할 수 있는 최고 성능의 명품이었다.

진글라이더 창업 당시만 해도 오스트리아의 노바(NOVA), 스위스의 아드방스(Advance), 대한민국의 대교가 전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다. 특히 대교의 에델은 송진석이 대교에 개발자로 재직하던 시절에 확보한 기술적 우위와 기존 제품군의 후광효과에 힘입어 세계 시장점유율이 40%에 육박하고 있었으며, 세계선수권대회나 월드컵 같은 권위 있는 대회에서도 여전히 강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환 위기의 여파로 인해 개발팀 전체를 구조조정한 대교에 더 이상의 미래는 없었다. 신제품 개발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대교의 성적은 진글라이더의 등장과 때를 같이해 각종 대회에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비즈니스 전략에 능했고 제품 마케팅에서 늘 한발 앞서가던 대교였지만, 글라이더를 상승시키고 활공을 지속시키는 힘의 원천이자 생명과 같은 바람(air)을 제대로 이해하는 디자이너를 잃은 이후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때 송진석이 대한민국 패러글라이딩 산업의 기적을 일구고 지탱하는 레인메이커(rainmaker)로 등장했다. 송진석은 성능이 탁월한 프로선수용 페러글라이더를 개발하기 위해 수백 번 넘게 디자인을 변경하며 시제품을 만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반복적인 시도와 수많은 시행착오, 수십 차례의 제품 테스트라는 산고를 이기고 1999년, 드디어 진글라이더는 첫 제품 ‘부메랑’을 출시했다. 첫 제품이 일본 선수들에게 인도되던 순간 진글라이더의 임직원들은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이 제품의 성공에 회사의 사활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부메랑은 송진석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패러글라이딩 독일 오픈에서 세계적인 조종사 가오로 오기사와를 앞세운 일본팀에게 깜짝 우승을 선사했다. 연이어 일본에서 개최된 월드컵 대회에서도 일본팀은 진글라이더의 부메랑으로 우승을 했다. 외골수 디자이너 송진석이 설립한 진글라이더가 출시한 제품이 공식적인 처녀비행에서 세계를 제패했다는 사실은 전 세계 패러글라이딩 동호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진글라이더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 후 1999년부터 2008년까지 진글라이더를 탄 선수들이 세계선수권대회 및 월드컵에서 수많은 우승을 거두면서 진글라이더는 동호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제작사로 자리매김했다. 그 이후 진(珍)글라이더의 한자(漢字) 로고는 동양이라는 미지에서 온 신비한 마술 같은 기술력의 상징이 되었다.

부메랑은 전문선수들이 기록을 내도록 디자인된 제품으로, 초보자나 동호인들이 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송진석은 부메랑의 명성을 바탕으로, 주력 상품으로 성장할 수 있는 보급형 글라이더 개발에 착수한다. 위기 대처 능력이 부족한 초보자가 돌발상황에 맞닥뜨리더라도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글라이더를 개발해야 했다. 50여 개의 시제품 제작과 총 6,000시간이 넘는 현장 실험을 실시한 끝에 탄생된 보급형 글라이더가 ‘볼레로’이고, 이를 개량한 모델이 ‘볼레로 플러스’이다. 부메랑이 세계대회에서 연이어 우승을 한 데 힘입어 보급형에 대한 수입상들의 주문이 쏟아지면서 진글라이더는 단기에 시장점유율을 40%까지 끌어올렸다.

이후 2015년까지 진글라이더는 세계 시장에서 최소 30%의 점유율을 유지하며 히든 챔피언으로 성장했다. 2017년 현재 구글 트렌드 분석을 보면 진글라이더는 개성공단 사태의 여파로 생산에 크게 차질을 빚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적인 주요 패러글라이더 브랜드로서의 위상을 지키고 있다. 세계적으로 패러글라이딩 마니아들에게 진글라이더는 향수가 깃든 브랜드이다. 여전히 많은 동호인들은 진글라이더의 제품을 기다리고 있다.

패러글라이더

패러글라이더는 상공에서 사람이나 물자 등을 안전하게 낙하시키기 위해 개발된 낙하산(parachute)과 무동력으로 활공하는 비행기를 의미하는 글라이더(glider)가 융합된 형태의 활공 장비이다. 1952년 캐나다 출신의 발명가인 잘베르트(Domina C. Jalbert)가 특허출원한 멀티셀 낙하산 캐노피(canopy)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잘베르트의 발명품은 지금의 패러글라이더와 달리 활공이나 상승(soaring)이 전혀 불가능한 장비로, 조종이 용이한 낙하산에 가까웠다.

현대적인 형태의 패러글라이더의 탄생은 1978년 프랑스의 산악인인 베텅(Jean-Claude Bétemps)과 본(André Bohn), 보송(Gérard Bosson)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맞바람을 받으면 사각형의 날개(airfoil) 모양으로 부풀어올라 활강(滑降)이 가능한 낙하산을 개발했는데, 높은 산을 등반한 후 본인들이 개발한 장비를 타고 산마루를 활강해 내려오기를 즐겼다. 이 사각형 낙하산이 진화를 거듭하여 지금의 패러글라이더 같은 파라펑트(parapente)로 진화되었다. ‘펑트(pente)’는 프랑스어로 ‘경사면(slope)’이라는 의미로, 초기의 패러글라이더는 경사면을 활강하는 낙하산으로 이해되었다.

이후 패러글라이딩은 개량을 거듭하면서 창공을 날고자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비교적 안전하고 저렴하며 수월하게 비행을 즐길 수 있는 레포츠 종목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국제항공연맹(FAI: the Fédération Aéronautique Internationale)이 패러글라이딩을 정식 항공스포츠로 인정하면서 저변 인구 또한 빠른 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는 1986년에 도입이 되어, 1989년부터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도입과 동시에 패러글라이더 제조 산업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현재 스포츠 패러글라이딩과 관련된 활동들은 대한민국항공회에서 주관하고 있다.4)

주요 모듈

패러글라이더 장비는 크게 글라이더, 하네스(harness), 구조낙하산(rescue parachute)으로 구성된다. 이중 글라이더는 날개(캐노피), 산줄(suspension lines), 상승기(riser) 3가지 모듈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패러글라이더 제조공정 및 전체 공급사슬(supply chain)은 1 날개(캐노피), 2 산줄, 3 하네스, 4 상승기, 5 구조낙하산, 5가지 모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Exhibit 1). 패러글라이더는 원단과 실이 주요 원자재이고, 봉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또한 세계적으로 전체 시장 규모가 크지 않아 자동화보다는 전통적인 배치(batch) 단위의 수작업을 통해 생산한다.

5가지 주요 모듈의 품질과 디자인은 완제품의 성능과 직결된다. 완제품은 주로 성능, 안정감, 조정력, 3가지 기준으로 평가된다. 성능 측면에서는 양력(揚力, lift)과 항력(抗力, drag)의 비율을 나타내는 양항비(揚抗比, lift-to-drag ratio)가 뛰어난 동시에 비행 속도도 빨라야 한다는 것이 관건이다. 따라서 날개나 산줄도 공기의 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는 최첨단 섬유 소재들을 주원료로 사용하게 된다. 조종사의 몸을 감싸는 하네스 또한 유선형으로 제작하여 패러글라이더의 속도를 극대화한다. 하지만 글라이더의 성능만을 기준으로 설계하다 보면 안전도가 떨어져 사고 위험이 증가할 수 있으므로 성능이 우수한 동시에 안정감과 조정력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제품 개발의 주된 목표이다. 여기서 조정력이란, 조종사의 의도대로 패러글라이더의 상하 좌우 이동이 용이함을 의미한다.

프로선수로서 송진석에게 패러글라이더란, 경쟁의 짜릿함을 선사하는 동시에 살아야 할 동기를 유발하는 삶의 모티브이다.

“공식 경기에서는 기상 상황에 따라서 비행 거리를 정하고 가상의 반환점을 정해줍니다. 반환점은 GPS(Global Positioning System)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환점까지의 거리가 멀 때는 한 200km 정도로 즉 서울에서 대전까지 비행을 하고 돌아오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구간에 따라서는 시간당 100km 이상의 엄청난 대지속도(ground speed)5)로 비행을 하게 됩니다. 경기 직전에 나선형 활공기법(swirling)을 이용하여 패러글라이더를 높이 상승시킵니다. 따라서 기체의 상승력이 선두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의 전초전이 되는 것이죠. 이렇게 GPS에 설정된 가상의 실린더 안에서 빙빙 돌면서 상승하고 있다가 정해진 시각에 출발신호가 떨어지면 최대 속도를 내기 위해 하강하며 치고 나갑니다. 이때 기체에 상당한 공기저항이 가해지는데, 항력이 적을수록 속도가 빨리 붙어 경쟁에 유리합니다. 위험하지만 숨 막힐 정도로 가슴이 떨리는 순간입니다.”

날개

날개는 멀티셀로 이루어진 직물로, 전면의 흡입구에 공기가 유입되면 양력을 일으키는 비행기 날개의 단면처럼 부풀어 포물선 형태의 캐노피가 만들어진다. 동일한 종류의 모델이라도 조종사의 체중에 따라 날개의 폭과 길이가 달라진다. 날개에서 중요한 요소는 직물의 소재인데, 경기용 패러글라이더의 경우에는 FAI 규정을 준수해야 하므로 모든 업체들의 공급원이 거의 동일하다.

산줄

산줄은 날개와 상승기를 연결하는 수십 가닥의 유선(wire)으로 고장력 저탄성 소재로 만들어지며, 조종사의 하중을 배분해 날개에 전달한다. 동시에 방향 전환, 상승 및 하강, 또는 속도를 조절하는 장치인 조종줄이 뒷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산줄은 변형률이 거의 없고 일정시간(약 300시간)이 지나면 조직이 파괴되는 단점이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을 비행하고 나면 반드시 교체해야 하는 소모품이다. 산줄 가운데 브레이크 핸들에 연결된 줄은 브레이크 라인으로 구분되며, 조종사는 주로 이 브레이크 라인을 이용하여 패러글라이더를 조종하게 된다.

하네스

하네스는 자동차의 운전석에 해당하는 부품으로, 조종사가 날개에 매달리기 위해 착용하는 안전벨트와 조종사를 감싸는 배낭 형태의 좌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네스에는 가속(boost) 페달이나 브레이크같이 조종을 돕거나 안전성을 높이는 추가 장치들이 부착되기도 한다. 하네스는 패러글라이더와는 분리된 별매품으로, 5가지 모듈 중에서 유일하게 독립적인 공급사슬 체계를 갖고 있다.

상승기

상승기는 날개 전체에 연결된 산줄들의 끝부분을 구역별로 모아서 이를 하네스에 연결하는 직물 소재의 벨트로, 탑승자를 가운데로 하여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하나씩 2개의 세트로 구성되어 있다(Exhibit 2). 상승기에는 조종줄이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이륙하기 위해서는 상승기를 끌어당겨 날개를 펼치고 최초 이륙을 하게 된다.

구조낙하산

구조낙하산은 패러글라이더가 난기류로 인해 제어가 불가능할 경우, 또는 날개의 균형이 깨지거나 날개가 접혀서 양력을 상실하는 경우와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 사용된다. 조종사의 안전과 생명을 보장하는 최후의 장비이다. 위기상황에서 조종사는 구조낙하산을 사출하여 착륙하게 된다. 구조낙하산은 기본적으로 글라이더의 구성요소인 날개와 산줄을 조립하는 것과 비슷한 제조 공정을 거쳐 생산된다.

시장 상황과 경쟁사

세계 패러글라이딩 산업은 경제성장률과 발맞추어 꾸준히 성장해 왔으며, 2015년 현재 시장규모는 소매시장 기준 약 3,200억 원 이다. 이는 패러글라이더 및 각종 액세서리들을 포함한 수치이다. 장기적으로는 여타 레포츠 산업처럼 소득이 상승하면 수요도 함께 꾸준히 상승하는 산업이지만 단기적으로는 날씨 상황 및 기후 변화에 민감하고 해당 국가의 물가지수 및 환율 등 다양한 요인들의 영향을 받아 수요의 변동 폭이 크게 나타난다. 이는 패러글라이더가 생필품이 아닌 취미생활에 필요한 기호품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다양한 위험요인들로 인해 비교적 유통마진이 크게 유지되어야 하는 산업이다.

패러글라이더가 프랑스에서 개발되어 정규 스포츠 종목으로 발전해온 까닭에 유럽이 최대 시장으로 입지를 굳혀왔다. 특히 패러글라이딩에 적합한 알프스 산맥을 중심으로 프랑스,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이 가장 많은 소비자군을 보유한 시장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유럽의 경우에는 산업이 성숙기를 맞이하여 수요의 증가세가 둔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북미 시장은 1인당 국민소득이 높고 레저 산업이 발달해서 애팔래치아 산맥과 로키 산맥을 중심으로 패러글라이딩 산업이 성장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안전사고에 대한 소송이 끊이지 않고 패소 시 지불해야 하는 피해보상의 규모가 막대하기 때문에 기존 업체들이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펼치지 못하고 있으며, 소득 대비 패러글라이더 수요는 높지 않은 편이다.

최근에는 가처분소득의 증가와 더불어 레저 활동이 확산되고 있는 중국을 중심으로 아시아에서 패러글라이더의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특히 이란의 경우에는 최근 2년 사이에 수요가 200% 이상 증가했다.

패러글라이더 B2C 시장은 비전문가인 동호인 시장과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을 포함한 전문가 시장으로 구분할 수 있고, 두 시장 모두 주로 전문적인 딜러들이나 제조사, 온라인 상점을 통해 제품을 구매하게 된다. 입문자나 동호인이 주요 고객인 보급형 제품의 표적 시장은 주로 패러글라이더를 가르치는 학교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형성된다. 정기적으로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전문가들이나 선수들은 고성능의 신제품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이에 기존에 보유한 패러글라이더 외에 추가로 신제품을 구매하여 여러 제품을 동시에 보유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전문가들은 가격민감도(price sensitivity)가 떨어지는 동시에 일정기간 동안 특정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편이다. 2016년 기준으로 보급형의 소매가는 대당 3,000∼6,000달러 선이었고, 전문가들이 즐겨 찾는 선수용 패러글라이더의 소매가는 대당 5,000∼8,000달러에 이르는 고부가가치 상품이다. 최고급형의 가격대는 한화 기준으로 약 천만 원 정도이다.

반면에 B2B 시장은 패러글라이더를 이용해 체험비행을 제공하는 관광회사들과 패러글라이딩 학교들, 그리고 이들에게 제품을 공급하는 딜러들이 주를 이룬다. 최근에는 세계적인 휴양지들을 중심으로 패러글라이딩을 체험하는 관광상품들이 개발되고 있는데, 이러한 체험비행에서는 전문 조종사가 패러글라이더에 관광객을 태우고 함께 활공하는 탠덤(tandem) 비행이 주를 이룬다. 체험 상품들과 연계하여 입문자들을 교육하는 패러글라이딩 학교가 각국에 설립되면서, 이들 교육기관들 또한 B2B 시장의 주요 고객으로 부상하고 있다. 교육기관들은 교육용 패러글라이더를 대량 구매할 뿐만 아니라, 일정기간 동안 교육을 이수한 교육생들의 공동구매를 통해 추가 수요를 발생시킨다. 체험비행 및 교육용 패러글라이더는 날개가 길고 폭이 넓어 상대적으로 안전한 보급형 제품들이 대부분이다. B2B 시장의 고객들은 가격민감도가 높은 편이다.

글라이더와 한 조를 이루는 하네스는 진글라이더, 아드방스, 슈페어(SUPEAIR) 제품이 시장에서 주종을 이룬다. 400달러 선의 멜빵 달린 배낭 형태의 산악용 하네스부터 2,000달러에 이르는 선수용 하네스까지 가격 편차가 크다. 현재 시장에서 가장 각광받는 제품은 진글라이더의 하네스인데, 이 중 최고가는 ‘진 지니 레이스 3(Gin Genie Race 3)’로 약 2,000달러에 이른다. 이와 더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 구조 낙하산으로, 가격대는 500달러에서 1,500달러까지 다양하다.

글라이더, 하네스, 구조낙하산을 모두 갖춘다고 하더라도 즉시 비행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조종사는 반드시 안전모나 경기용 헬멧을 착용해야 하며, 패러글라이더 구성품을 모두 담을 수 있는 배낭도 필요하다. 또한 다수의 조종사들이 그룹 비행을 할 때는 통신장비와 헤드셋도 갖추어야 하며, 프로페셔널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GPS 및 기압계도 필수 장비로 갖춰야 한다. 이러한 액세서리들을 모두 장만하려면 약 1,000~2,000달러의 추가비용이 발생한다. 태양의 적외선은 글라이더를 자연 마모시키고, 특히 산줄 및 날개의 유연성을 감소시키므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산줄 같은 소모품들은 반드시 지속적으로 교체해주어야 한다.

세계적으로 대략 40개의 업체들이 패러글라이더를 제조하고 있으며, 이 중 연간 2,000대 이상을 판매하는 기업은 진글라이더를 포함해 4개 업체로 압축된다(Exhibit 3).6) 이 밖에도 보급형 제품에 주력하며 진글라이더에게 꾸준히 OEM 물량을 주문해오고 있는 스카이워크(Skywalk)라는 독일 기업이 있다. 진글라이더를 제외한 업체들은 모두 유럽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이들 중 노바와 아드방스는 패러글라이딩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설립되어 패러글라이딩의 발전과 더불어 진화해왔다. 반면에 진글라이더는 대한민국에 본사를 두고 북한의 개성과 중국의 칭다오에서 주로 생산을 해왔다. 우리나라는 시장 규모가 협소하여 생산량의 대부분을 수출하고 있다.

패러글라이더 제조업체들은 크게 경기용 모델 개발에 주력해 세계대회에서의 우승을 통해 제품 성능 중심의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는 기술선도업체(오존, 진글라이더)와 동호인, 레저관광업체 및 교육기관을 대상으로 범용적인 제품을 주로 생산·판매하는 추종업체(market follower, 노바와 아드방스)로 구분된다. 진글라이더는 1998년 회사 설립과 동시에 각종 세계대회를 석권하면서 제품의 우수성을 바탕으로 보급형 시장을 장악해왔다. 한때 패러글라이더 시장은 ‘진 랜드(Gin Land)’라고 불리기도 했다.

“독일 고객들은 소득수준이 높아서 장비는 무조건 최상급을 찾습니다. 비행도 별로 하지 않으면서 고집스럽게도 성능, 특히 안정성 측면에서 최고인 제품을 원하죠. 반면에 프랑스나 스페인 고객들은 핸들링의 맛이 좋은 진글라이더나 오존을 좋아합니다. 스포티한 장비를 이용해 역동적인 비행을 즐기는 쪽이지요. 그러니 프랑스나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독일의 문화나 사고방식이 이해가 안 가는 겁니다.”

독일의 스카이워크나 오스트리아의 노바가 안전하기로는 정평이 나 있지만 정작 종주국인 프랑스나 스페인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역동적인 면이 떨어진다는 인식 때문이라고 송진석은 말한다.

“진(珍)은 한국 제품이잖아요? 어찌 생각하면 한국 제품을 탄다는 것이 창피할 수도 있을 텐데…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요. 스위스 상표들 중에는 매우 럭셔리한 제품도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인들은 물론 많은 유럽인들이 제가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진(珍)을 선호해왔습니다. 과거에 월드컵에 출전하면 60% 이상의 선수들이 진글라이더를 타는 거예요. 장관이었죠. F17) 시상대에 오르는 경주차를 개발해서 유명세를 타고, 이를 바탕으로 시장에서 스포츠카를 파는 것과 같은 전략으로 갔거든요.”

그러던 진(珍)의 신화가 2009년에 무너졌다.

“예전에는 삼류로 취급받던 프랑스 기업이 있어요. 오존이라고. 우리가 월드컵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근 10년간 독보적인 위치에 있을 때, 오존의 꿈은 진글라이더처럼 되는 거였어요. 그러던 오존이 프랑스 태생의 뤼끄 아르망(Luc Armant)이라는 괴짜 엔지니어를 영입한 겁니다. 유체역학을 공부한 사람인데 천재적인 면이 있어요. 그 사람이 비행을 하면서 산줄의 개수를 줄이고 날개의 모양을 혁신적으로 개선할 아이디어를 떠올린 거예요.8) 그래서 새로운 설계안을 가지고 오존을 접촉했는데 오존이 그를 받아들였고, 아르망의 아이디어를 적용한 ‘망트라(Mantra)’라는 모델이 획기적인 성능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오존은 삼류에서 졸지에 세계 정상에 섰습니다.”

오존의 급부상은 진글라이더의 등장처럼 드라마틱했다. 오존은 애초에 진(珍)과는 경쟁이 안 되는 군소 브랜드였고, 이전에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 번도 우승을 한 적이 없었다. 2009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오존은 단 2명의 선수를 출전시켰다. 그런데 이 대회에서 오존은 우승과 준우승을 거머쥐는 대이변을 만들었다. 뼈아프게도 3등부터 10등까지는 대부분 진글라이더를 탄 선수들이 차지했다. 오존이 단 2명의 선수로 골리앗 진글라이더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다.

패러글라이더 시장에 지각변동이 일어났고, 오존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 같던 1위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경기용 패러글라이더 시장은 오존과 진(珍)의 양강 구도로 재편되었다. 코카콜라와 펩시의 극심한 경쟁으로 인해 군소 청량음료 회사들이 오히려 맥을 못 추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 전개된 것이다. 오존의 우승 소식은 언론매체와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설상가상으로 2013년과 2016년에 연이은 개성공단 패쇄로 인한 진(珍)의 제품 생산 중단은 오존이 시장에서 호황을 맞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진글라이더의 생산 차질과 맞물려 오존의 보급형 제품들은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2014년과 2015년에 진글라이더의 판매량은 스카이워크의 외주 물량을 포함해 약 5,000~6,000대였지만, 오존은 자체 브랜드만으로 연간 5,000대 이상을 판매했다. 개성공단이 폐쇄된 2016년에는 생산 능력(production capacity)의 부족으로 인해 스카이워크가 주문한 외주 물량 공급마저 포기함에 따라 진글라이더의 판매량은 연간 약 3,000대 정도로 급감했다. 반면 오존은 최근에 확보한 시장의 힘을 바탕으로 공장 규모 확장에 박차를 가했으며,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주문 시스템을 구축하는 동시에 많은 생산설비를 자동화해 경쟁업체 대비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있다.

“마치 F1에서 빨간색 페라리가 잘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파란색 레드불이 나와서 각종 경주에서 우승을 독식하는 것 같은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9)

노바와 아드방스는 진글라이더보다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다. 이들은 오존과 진글라이더에 맞서기 위해 공동으로 제품 개발을 진행하는데, 최근에 합작을 통하여 개발 역량이 크게 증진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노바와 아드방스도 대회에는 참여하고 있으나 선수용 제품을 양산하지는 않으며, 보급형 시장에서의 점유율은 각각 20~30%에 이른다. 노바의 경우 공장이 헝가리에 있기 때문에 유럽 시장에 대한 접근성이 용이하며, 물류비용과 배송시간 측면에서 타 업체에 비해 유리한 면이 있다.

패러글라이더 제조업은 노동집약적 산업으로, 주요 업체들은 자체 공장을 보유하고 있다. 자체 제작을 하는 것이 아웃소싱을 하는 데 비해 기술보안 유지에 효과적이고, 직원들의 높은 숙련도로 인해 품질을 유지하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또 학습효과를 바탕으로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데도 유리하다. 따라서 주요 업체들은 숙련된 노동자 구하기가 용이하고 노동 원가가 낮은 지역에 생산기지를 구축하고 있다. (Exhibit 3)에 정리된 것처럼 진글라이더의 경우는 북한의 개성과 중국 칭다오에서, 오존과 아드방스는 베트남에서, 노바는 헝가리에서 자체 생산기지를 운영해왔다. 양질의 노동력이 풍부한 베트남은 최근 EU와 FTA(Free Trade Agreement)를 체결하면서 진출 업체들에게 관세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최근 들어 패러글라이더 업체들 간의 기술 격차는 좁혀지는 양상이며, 보급형 제품의 가격경쟁은 심화되고 있다. 따라서 품질과 제품 성능만을 차별화하여 시장을 선도하고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에 진글라이더는 고성능 제품을 개발하는 전략 외에도 공급사슬을 효율적으로 디자인하고 운영하여 물류비와 간접비를 줄임으로써 수익성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다.

진글라이더의 생산 시스템

진글라이더는 1998년 용인에 작은 규모로 생산설비를 갖춘 후 2001년 1월 칭다오 공장을 설립했고, 이어서 2007년 5월 개성에 제2공장을 설립했다. 개성공단 폐쇄 전까지는 용인, 칭다오, 개성으로 연결되는 생산 및 공급사슬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들의 생산 업무 분장은 (Exhibit 4)와 같았다. 칭다오 공장에서는 볼레로 같은 보급형이나 스카이워크를 비롯한 경쟁업체들이 주문하는 외주 물량을 소화했고, 개성 공장에서는 아틀라스 같은 전문가용, 부메랑 같은 경기용 제품과 상승기, 하네스 등을 생산했다. 칭다오와 개성의 생산기지가 자리를 잡은 후 용인 본사에서는 주로 제품개발 업무와 신제품 테스트, 그리고 딜러들이 처리하지 못하는 선수용 글라이더나 고급형 제품들의 애프터서비스 업무를 담당해왔다.

R&D와 제품개발

진글라이더 제품들은 모두 용인 본사에서 개발된다. 매년 매출액의 최대 15%를 R&D에 투자하고 있으며, R&D는 경기용 글라이더를 개발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목표는 항상 세계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는 최상급의 안전한 패러글라이더를 개발하는 것이다. 경기용 패러글라이더를 개발하면서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보급형 패러글라이더를 개발한다. 초창기 개발 전략은 무한 반복 실험이었다. 개발에 필요한 장비들이 불충분했기 때문에 현장 실험 위주로 개발이 이루어졌다. 진글라이더의 박정목 개발팀장은 진글라이더의 개발 역사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대표님의 감각적인 부분과 개인적인 노하우에 의존했다고 봐야죠. 직접 실험을 수행하셨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상세한 부분들까지 보정했습니다. 이렇게 7~8년을 해왔는데 패러글라이더의 구조와 기술이 점점 발전하고 복잡해지니 현장 실험의 횟수와 개발해야 하는 시제품(prototype)의 수도 늘어나고, 기간도 길어지고, 개발 비용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습니다. 한계가 온 것입니다. 그때부터 과학적인 접근법을 시도했고, 기본적인 수치들을 계량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진글라이더는 서울대학교, 옥스퍼드대학교, 스위스 항공연구소의 항공학 또는 유체공학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는데, 이들은 대부분 패러글라이딩 마니아들이다. 이론적인 이해도가 높아지고 기체구조와 성능 간의 인과관계가 밝혀지기 시작하니 시행착오가 줄어들었다. 기술적으로는 공기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산줄을 가늘게 하고 그 개수를 줄여가면서도, 산줄과 날개의 균형을 맞추고 조정력의 정확성을 강화하여 속도와 안정성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진글라이더는 한 해에 2, 3개의 모델을 개발하며, 모델당 6개월에서 1년의 개발 기간을 갖는다. 신모델 개발은 기존 제품의 수명주기에 맞추어 진행되는데, 경기용은 2년, 보급형은 3~4년 정도의 싸이클이다. 수명주기가 끝나기 1년 전에 개발에 착수하고, 개발이 완료되면 자동차처럼 기존 모델과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며, 기존 모델은 시장에서 철수시킨다. 신제품 개발 시에는 시장 트렌드를 분석하고 기존 제품에 대한 조종사들의 사용 후기를 참고할 뿐 아니라, 종종 역공학(reverse engineering)을 통해 경쟁 모델들에 대한 분석을 실시한다.

신제품 설계도가 완성되면 용인 공장에서 시제품을 제작하고 각종 테스트를 거친다. 테스트 과정에서 제품을 보정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이 작업들은 용인 본사에서 수행한다. 조종사의 체중에 따라 한 모델당 적게는 3개, 많게는 6개의 다른 크기로 제품들이 출시되며, 이들 모두가 동일한 테스트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렇게 개발된 글라이더가 시장에서 수명을 다할 때까지 3,000~4,000여 대 판매되면 히트상품으로 인정받게 된다. 현재 진글라이더는 총 12종류의 모델을 갖추고 있으며, 모델당 3~4가지의 다른 색상과 3~6가지의 다른 사이즈로 구성되어, 동일 모델당 최대 24종의 다른 제품들을 보유하고 있다.

오존과의 기술개발 경쟁은 쉽지 않은 게임이다. 아무리 혁신적인 기술이라도 패러글라이더의 장점을 저해하고 안전이 담보되지 않으면 채택하는 데 무리가 따른다. 패러글라이딩은 행글라이딩과 달리 바람이 부는 언덕이라면 장소를 불문하고 쉽게 글라이더를 펼치고 곧바로 비행에 나설 수 있다. 장비가 가벼워 편하게 들고 갈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경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비행속도 위주로 제품을 개발하면, 날개의 구조를 지지하는 보강재들이 많이 삽입되고 점차 패러글라이더 본연의 특성인 가벼움, 운반의 편리성 및 안정성이 사라진다. 이러한 제약 조건들로 인해 기술의 진보가 더딘 편이다. 이 한계점들을 박정목 개발팀장은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지나치게 성능이 좋아져 속도가 빨라지다 보니 제어할 수 없게 되고, 사고가 나거나 조종사들이 사망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패러글라이더 본연의 장점을 살려야 하는 문제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기술의 진보가 굼벵이처럼 매우 더딥니다.”

심지어 업체들은 신기술에 대한 특허를 등록하고 기술계약을 체결하는 것도 꺼리고 있다. 세계적으로 특허를 등록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특허권 사용료를 받은 패러글라이더가 사고가 날 경우에 발생하는 소송비용이나 피해보상액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기 때문이다.

개성공업지구

개성공업지구(개성공단)의 탄생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기인한다. 햇볕정책은 북한과의 경제 협력과 대북지원을 전제로 평화통일의 주춧돌을 쌓기 위한 정책이었다. 손을 먼저 내민 것은 현대그룹의 창업주인 정주영 회장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휴전선 이북에 위치한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난 연유로 대북사업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1998년 정주영 회장의 ‘소몰이 방북’ 이후에 이어진 금강산 관광사업은 남북한 화해무드의 출발점이 되었다.

더디게 진행되던 남북 경제 협력은 2000년 8월 현대아산과 북한의 아시아태평양위원회가 경제특구 건설에 합의하면서 급물살을 탄다. 남과 북은 중국의 선전(深圳)이나 푸둥(浦東)같이 세계적인 자유경제지역 개발을 전제로, 사회간접자본 및 투자환경을 조성하고 기업들을 유치하는 동시에 입주 기업들에게 무역, 금융 및 주거 서비스를 제공하는 복합단지를 구상하였고, 추후 문화관광사업을 통한 추가적인 부가가치 창출로 공동 번영을 추구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2002년 8월 제2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가 『개성공업지구 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면서 구체화되었다. 신의주와 해주 또한 후보지로 검토되었으나 개성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2003년에 있었던 1단계 개발 착공식에 이어 2004년에는 9만 3천m2에 대한 시범 분양을 실시하여 총 26개 업체가 선정되었고, 2005년에는 16만 9천m2에 대한 1차 분양을 실시하여 총 23개 업체가 선정되었다. 분양 초기에는 생산기지로서의 기반시설이 부족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우리 정부는 개성공단 입주 업체들이 사실상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공단의 국제경쟁력 제고를 위해 국내 공단 개발에 준하는 사회간접자본 및 지원제도를 마련키로 하였다. 따라서 도로, 변전소, 폐수처리장 등의 시설공사와 전력공급, 상하수도, 통신망 등의 산업기반 공사를 2007년에 모두 마무리했다.10)

정부 인사들의 적극적인 추천을 받아 진글라이더도 2차 분양에 참여하여 2007년에 개성으로 입성한다. 토지분양가는 평방미터당 45,000원으로 책정되어 국내에 공장을 건설하는 데 비해 상당히 저렴한 편이었다. 개성공단의 토지는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에 등록한 이후 만기 시점인 2054년까지 이용이 가능하다. 만기 6개월 전에 북측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과 재계약을 맺으면 연장이 가능하며, 당시 재무구조가 나쁘지 않았던 진글라이더에게 280만 달러라는 투자 총액은 크게 부담 가는 금액은 아니었다.

“체제가 다른 지역에 공장이 위치하다 보니 직접 고용할 권한도 인사권도 없습니다. 권한이 없으니 물량이 달린다고 추가 고용을 하거나 잔업 시간을 늘리기도 어렵습니다. 직장장이 북측 근로자들을 대표하는 사람인데, 근로자들에게는 왕이나 마찬가지죠. 직장장은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라는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의 지시를 받고 옵니다. 상여금을 얼마 주느냐, 닭 한 마리를 달라, 초코파이를 더 달라 아웅다웅합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생산성만 좋다면 챙겨주는 것은 별거 아닌데, 어디는 주고 어디는 안 준다고 입소문이 나면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몇 년이 지나니 인센티브를 지급하라고 요청을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당신들은 그런 제도 없잖아!’라고 버럭 했습니다. 공동분배를 원칙으로 한다면서 인센티브라니, 참 나.”

입주 초기에는 체제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고 송진석은 말했다. 정부 차원에서는 남북협력지구발전기획단과 북한의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을 중심으로 이러한 갈등을 조율했다. 2013년에 공단 가동이 중단되었다가 정상화되면서 남북 당국 간 상설협의기구로서 개성공단 남북공동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그 산하에 관리운영, 국제경쟁력, 출입체류 및 통행·통신·통관의 4개 분과를 설치하여 공단운영 정책과 현안을 협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운영상의 문제점들은 정치·사회·군사적 위험요인 들에 비하면 사소한 것들이었다. 송진석은 항상 심리적으로 좇기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개성을 잘만 이용했으면, 특히 그 심리적인 불안감만 없었으면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케이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정부가 북한이 뒤에서 또 일을 벌인다고 발표하면 북한도 반박하면서 미사일 쏜다 하고. 그러면 보수단체들이 북한에 퍼주기식 사업은 그만하라고 들고 일어나고, 진보단체들이 맞대응하고. 그럴 때마다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죠.”

남북경제협력이 진행되는 중간에도 북한의 호전적인 도발은 멈추지 않았다. 2010년 3월 천안함이 침몰하자 남북 관계는 또다시 경색 국면에 접어들었고, 우리 정부는 일련의 대응 조치를 발표했다. 이러한 조치들 중에는 개성공단에 대한 신규 투자를 금지하고 공단의 체류 인원을 절반 수준으로 축소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북한은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을 통해 일련의 조치들이 공단 폐쇄를 위한 사전 작업이라고 비난했다. 2010년 11월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했고, 우리 군은 K9 자주포로 맞대응했다. 이어서 2013년에는 북한이 핵 실험을 강행했고,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강경한 입장이 발표되자 북한은 같은 해 4월, 개성공단으로의 출경(出境)을 금지하고 남쪽으로의 귀환만을 허용하는 봉쇄 조치를 취했다. 곧이어 우리 정부는 개성공단에 있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근로자들을 모두 철수시키기에 이른다. 당시 진글라이더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송진석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숨 막히는 경험이었죠. 물건들을 봉고차에다 싣고 지붕에도 막 실었습니다. 소나타에도 창문 옆으로 삐죽삐죽 나올 정도로 막 실어대고. 그렇게 모두들 빠져나오려고 하는데 북한 사람들이 문 앞을 막아섭디다. ‘안 된다! 다 놓고 나와라. 생필품만 가지고 나와라!’ 그쪽 사람들도 약이 오른 거지요. 서로 약속했는데 문을 확 닫아버리니까, 뭔가 담보로 잡을 게 있어야 된다고 느낀 것 같습니다.”

우리 정부의 공단 폐쇄 방침에 따라 개성공단은 전기와 상수도 공급도 중단되었다. 이후 남과 북은 2013년 7월부터 일곱 차례에 걸친 실무회담을 개최했고, 8월 14일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합의서를 채택했다. 이로써 160여 일이 지난 2013년 9월 16일에 개성공단이 가동을 재개했다. 하지만 주문이 취소되거나 생산량 축소에 따른 납품지연으로 입주 기업들은 운영상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수출에 의존하는 진글라이더에게 그 파장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고객들의 신뢰에 금이 간 것이다.

“당시에는 개성공단에 다시 들어가야 하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정치 사회적으로는 황당한 측면이 있지만, 개성은 여러 면에서 장점이 있습니다. 아침에 원자재 들고 들어가서 저녁에 완제품 갖고 나올 수 있는 나라가 지구상에 어디 있나요? 정치적으로 안정되기만 하다면, 우리 기업들이 아웃소싱하기에 가장 유리한 곳이 북한이고, 그중에서도 개성일 겁니다. 가까우니 물류비도 거의 안 들고, 같은 언어를 쓰는 것도 커다란 장점이고요. 대화가 되니 기술 이전도 빠릅니다.”

송진석은 개성공단의 시설은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다고 했다. 생산을 위한 제반시설도 안정화되었고, 주거시설, 소방서, 의료원 및 탁아시설도 생겼다. 기술교육센터에서 근로자를 선행교육하고 종합지원센터에서 공단 운영을 맡았다. 지원센터에는 남북공동위원회 사무처, 관리운영위원회 등 업무시설과 은행 및 편의점 같은 편의시설이 입주해 있었다. 회의실, 홍보관 및 제품판매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 콧대 높은 직장장과 호형호제 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자연스레 선물도 주고받게 되었고요. 기본적으로 북한 근로자들이 우수한 인적자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성실하고 숙련도도 높고, 무엇보다도 남한 사람들에게 어수룩하게 보일 수는 없다는 자존심도 매우 강해서 일을 꼼꼼하게 합니다. 특히 한민족의 손기술이란 비교할 데가 없죠. 직장장과 소통이 되니 종업원 관리도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반면, 같은 시기의 칭다오 공장은 중국에 진출한 중소기업들처럼 급격한 인건비 상승과 중국 기업과 차별된 세제 정책으로 인해 경영환경이 악화되고 있었다. 개성의 경우, 북한이 일방적으로 임금 인상을 요구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따라서 진글라이더는 개성 공장에서의 인력 수급이 유연하고 안정화된 이후, 칭다오 공장의 가동률을 축소하고 개성의 가동률을 확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정치적·군사적 위험을 배제한다면 개성공단은 생산성 측면에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성공단의 성공 가능성은 총생산액 추이에서도 쉽게 입증된다. 개성공단의 총생산액은 2007년 초 1억 달러를 돌파한 이래 2013년에는 20억 달러, 2014년 말 현재 26억 6,974만 달러에 이르렀다. 2014년 연간 생산액도 4억 6,997만 달러에 이른다. 북한 근로자 수도 2004년 10월 55명 고용한 것을 시작으로 꾸준히 증가하여 2014년 12월 말 현재 5만 3,947명으로 5만 명 선을 유지하고 있었다.11)

made in Korea 효과

송진석은 본인이 국가관이 투철한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애초에 에델의 제작에 참여했던 이유도, 진글라이더를 설립한 취지도 국산 브랜드의 세계화를 꿈꿔왔기 때문이다.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제품은 국내 시장에서는 100% 국산품으로 인정받았다. 내수 판매의 경우는 ‘made in Korea’, ‘made in Korea(Gaesong)’, ‘한국산’ 등 다양한 원산지 표식이 가능했다.

수출의 경우에는 개성공단에서 생산한 상품은 역외가공(Outward Processing: OP)으로 구분된다. 역외가공의 조건을 충족하여 한국산으로 인정받으면 FTA 체결국에는 무관세로 수출이 가능하다. 협정국별로 다소 차이가 있지만 통상적인 국제기준으로는 원자재의 60% 이상을 국내에서 제조했다면 역외에서 가공되어도 한국산으로 인정받을 수가 있다. EU와 미국은 정치적인 이유로 개성공단 제품을 한국산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인도, 싱가포르, 페루, ASEAN(The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동남아시아 국가연합)12)과 EFTA(The European Free Trade Association: 유럽자유무역연합)13)에서는 부품 국산화율에 따라 한국산으로 인정받을 길이 열려 있다. 장기적으로 EU와 미국에서 개성공단의 제품이 한국산으로 인정되면 중국산이나 동남아산에 비해 프리미엄 이미지를 보유한 한국산의 가격경쟁력이 한 단계 제고되는 것이다. 패러글라이딩 산업에서 이러한 수익성 확보는 산업의 저변 확대를 위해 지불해야 하는 간접 마케팅 비용, 즉 국제대회 스폰서십, 커뮤니티 활동 지원 비용 등을 마련하는 데 있어 중요한 사안이다.

칭다오

2000년대 초반부터 볼레로 주문이 급상승하자 생산의 문제가 발생했다. 각종 테스트를 반복해서 성능과 안전에 만전을 기하려는 송진석의 철두철미한 성격도 신제품 출시와 제품 출하가 지연되는 데 한몫했다. 용인보다는 큰 규모의 생산시설이 필요했다. 이때 송진석의 눈에 들어온 것이 중국의 칭다오공단이었다. 우리 기업들이 앞다투어 중국으로 진출하던 때였다.

칭다오는 중국 산둥성(山東省)에 위치한 부성급 도시이다. 서해를 가운데 두고 우리나라와 가장 인접하여 역사적으로도 한중교류가 빈번했던 지역이며, 중국과의 공식수교 이후에는 우리 기업들의 투자가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다. 1984년에 경제특구로 지정되었으며, 1986년부터는 중앙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경공업 중심의 임가공 생산기지로 관리되었다. 1992년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첨단기술 산업개발구로 지정된 이후에는 조선업과 석유화학 산업 중심의 중공업 단지도 조성되어 선진화된 산업구조를 갖추었다. 이 시기에 중국 정부는 해외투자자본 유치를 위한 다양한 지원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칭다오는 세계 10대 물동량을 자랑하는 항구도시로 무역업, 물류업, 창고업이 발달했다. 우리나라의 항구들과 정기 해운으로 연결되어 있고, 중국의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망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내륙 운송의 시발점이자 교통의 요충지이다. 중국 최고의 국제컨테이너 중계항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하역 및 통관에 있어서 중국 내의 여타 항구들과 비교해도 빠른 처리 능력을 가지고 있어 신속성이 요구되는 제품의 가공무역에 적합한 경제특구이기도 하다.

1990년대를 지나 중국의 내수시장이 급성장함에 따라 칭다오는 중국 내수시장 개척의 거점 도시로 활용되었다. 우리 정부도 칭다오의 장점들을 인식하고 공동물류창고 운영 및 영사 업무를 강화하여 우리 기업들의 진출과 입주를 지원하였다. 송진석의 개인적 판단으로도 칭다오는 매력적인 도시였던 터라 2001년 1월에 1차로 20만 달러의 자금을 투입해 칭다오에 공장을 설립하게 되었다.

2007년 국제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중국의 투자환경은 외자 기업에게 급격히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중국은 2008년부터 종신고용을 보장하는 노동계약법과 법인세 인상을 위한 기업소득세 법안을 통과시키고 규제를 강화하는 내용의 법령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자국 근로자들의 권익을 향상시키고 외국 기업들에 제공하던 세제혜택을 줄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중국 정부의 외국 기업들에 대한 규제와 차별정책은 중국 경제성장의 둔화 및 내수시장의 부진과 맞물려 칭다오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의 경영 악화로 이어졌다. 진글라이더에게도 지속적인 인건비 상승은 골칫거리였다. 특히 2010년 이후 인건비 상승률이 물가상승률에 못 미쳐 근로자들의 생활수준이 악화되고 있다는 점을 이유로 중국 정부는 매년 15%의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양극화와 복지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부가 그 역할을 기업들, 특히 외국 기업들에게 떠넘기는 조치였다. 자본주의의 유입에 따라 중국인들의 생활양식과 가치관이 변화하면서 근로자들의 근무태만도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의 기술숙련도와 노동생산성도 예전만 못했다.

이 시기에 진글라이더는 중국에서의 철수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칭다오에 비하면 개성은 천국이었다. 하지만 몇 가지 현안이 진글라이더의 발목을 잡았다. 첫째는 중국의 까다로운 기업청산 절차였다. 외국 기업이 청산하게 되면 그동안 감면받거나 공제받은 법인 소득세를 반환하고, 면제받은 토지세나 토지 사용료도 모두 환불해야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환불금액 정산 및 기업청산 절차가 복잡해서 최소 6개월에서 길게는 2년 이상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기업의 자금이 묶이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청산을 신청하고 본국으로 귀환하는 기업들도 많았지만, 엄두를 내지 못해서 야반도주하는 기업들도 있었다.

둘째는 중국 내수시장의 지속적인 성장이다. 국민소득 증가와 더불어 현금 동원 능력이 있는 부자들이 늘어나자, 덩달아 패러글라이더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중국 내수판매의 꾸준한 신장은 진글라이더의 칭다오 철수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더구나 2010년 이후 남북 간의 긴장 관계가 개선될 기미가 없자 송진석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의사결정을 미루고 미적거렸던 것이 이후에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다. 만약 칭다오에서 철수했더라면 개성공단 폐쇄로 인한 피해는 진글라이더에 회복할 수 없는 치명타가 되었을 것이다.

생산 공정

진글라이더 제품 생산의 핵심 기술은 봉제기술이다. 글라이더 및 하네스 제작에 있어서 대부분의 공정은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Exhibit 5)는 생산 공정 순서도이다. 제조 과정은 크게 양산 제품 생산과 시제품 생산 과정으로 나뉘는데, 시제품은 주로 제품 개발 단계나 딜러에게 샘플을 보내야 하는 경우에 제작된다.

(Exhibit 5)와 같이 수입된 원단에 패턴을 인쇄한 후 연단, 재단, 로고 인쇄, 합복, 최종 조립의 과정을 거쳐 제품이 완성되며, 패턴 인쇄를 제외한 모든 공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생산공정은 크게 날개, 산줄, 상승기 공정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진글라이더에서는 이들을 병렬공정(parallel processing)으로 동시에 진행하지 않고 순차공정(sequential processing)으로 작업해 하나의 패러글라이더를 완성시킨다. 작업은 보통 모델별 배치 단위로 이루어지고, 패턴 인쇄로 출발하여 하나의 완전한 글라이더가 완성되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은 15~16시간이다.

하네스와 구조낙하산 제작은 별도의 제작 과정을 거치며, 인기 있는 제품들은 수요를 예측해 사전 제작한다. 초보자용 볼레로 또한 미리 생산한 반제품들을 최종 조립해 완제품을 만들기도 한다. 하네스는 독립적으로 판매하거나 경쟁사로부터 주문 받는 경우도 있어서 글라이더와는 분리된 제조 및 유통 과정을 거친다. 반면 고급형이나 경기용 제품은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특별한 디자인이나 기능들을 추가해 제작하기도 한다. 이때에는 맞춤형 주문생산방식을 채택하는데, 이 과정은 주로 용인 본사에서 이루어진다.

제품의 다각화

송진석의 삶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행글라이더, 요트, 패러글라이더 그리고 패러글라이더 산업의 최고봉에 이르기까지 항상 블루오션을 찾아 헤맸는지 모른다. 2007년 산악인들을 위한 초경량 패러글라이더 ‘예티’14)를 개발한 이유도 정상에 오른 알파인 등반가들에게 패러글라이딩에서 느낄 수 있는 신비감과 평화로움을 선사하기 위해서였다. 송진석은 기존에 20kg 정도였던 패러글라이더의 무게를 약 1/7 수준인 2.8kg으로 줄여 이를 배낭에 넣고 등반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예티는 출시 이후 산악지형의 절경을 하늘에서 촬영하고자 하는 사진작가들의 애호품이 되었다. 작고 가벼운 예티를 개발함으로써 패러글라이딩 스포츠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것이다.

10여 년 전부터 진글라이더는 스피드라이딩(speed-riding)(Exhibit 6)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스피드 라이딩은 패러글라이딩과 스키 활강이 하나로 결합된 익스트림 스포츠의 한 형태이다. 이때 사용되는 스피드 글라이더는 스키 활강 속도를 높여주면서 불규칙하거나 가파른 경사면을 활공의 형태로 쉽게 통과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2014년에는 진글라이더의 ‘플루이드 2’를 탄 마틴 슈리케(Martin Schricke)가 프랑스 스피드라이딩 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다.

동시에 진글라이더는 하네스를 이용한 사업다각화와 베트남 생산기지 설립을 고려하고 있다. 하네스는 일종의 조종석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패러글라이더가 조종사를 운반하는 장비라고 이해하면 된다. 특히 하네스는 탠덤 비행의 경우 성인 두 사람의 무게를 지탱하는 인장력을 지녀야 하므로 이러한 기술은 무거운 애완동물 캐리어나 대체 운반 장비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송진석의 판단이다.

개성공단이 폐쇄된 이후에는 하네스의 생산이 특히 문제가 되었다. 하네스는 개성 공장을 설립한 이후에 칭다오에서 개성으로 생산을 모두 이관했기 때문에 수년 동안 칭다오에서는 생산을 하지 않았다. 그 수량이 적기는 하지만 글라이더와 별개로 소매 딜러들의 주문을 받아 생산하는 물량도 있었다. 개성공단이 문을 닫은 현재, 당장 어디에서 하네스를 생산할 것인가가 큰 숙제로 남아 있다.

진글라이더 공급사슬의 단절

지속가능한 기업 운영을 위해서는 안정적인 원자재 공급망의 확보를 위한 구매 관리, 품질의 안정성과 생산의 효율성 및 유연성을 위한 생산 관리, 그리고 제품 생산 이후 고객사로 물건이 전달되는 과정을 책임지는 물류 및 유통 관리가 모두 유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구매, 생산, 유통으로 이어지는 제조기업의 주요 활동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견고하고 회복력이 강한 공급사슬의 구축과 유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공급사슬은 지리적, 사회적, 정치적인 요인들에 기인한 지정학적 위험요소들과 자연재해 및 물리적 사고로 인해 발생하는 장애들로 인해 그 안정성이 끊임없이 위협받게 된다. 심각한 경우에는 공급사슬의 단절(supply chain disruption)이 발생하기도 한다. 진글라이더는 2013년에 이어 2016년에 다시 발생한 개성공단 폐쇄 조치(정치적 위험)로 인해 심각한 공급사슬의 단절에 직면한다.

(Exhibit 7)은 개성공단이 폐쇄되기 전 진글라이더의 공급사슬 흐름을 보여준다. 패러글라이더 제작을 위해 구매해야 하는 주요 부품은 원단, 줄, 금구류 등이다. 패러글라이더와 하네스 그리고 구조낙하산의 주재료로 사용되는 원단은 프랑스의 NCV인더스트리와 우리나라의 도미니코텍스교역으로부터 공급받고 있으며, 산줄을 가공하는 데 필요한 원재료는 독일의 에델리드(EDELRID)와 리로스(LIROS) 그리고 우리나라의 대구유직에서 주로 공급받고 있다. 금구류 등의 부자재는 프랑스의 슈페어와 대만의 킹스냅스(King Snaps) 등의 업체들로부터 공급받고 있다.

(Exhibit 8)은 진글라이더의 계절별 수요를 보여준다. 패러글라이더는 시장 환경과 기후 및 계절성을 많이 타는 제품이기 때문에 주요 모듈로 가공되는 원자재들의 재고량 변동성이 심하다. 특히 패러글라이딩 시즌이 마감되어 완제품에 대한 수요가 거의 없는 겨울철에는 사전 제작에 대비한 원자재 구매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표준화된 보급형 모델들의 반제품 생산이 중점적으로 이루어져, 재고자산이 일시적으로 증가한다. 비수기인 겨울철을 제외하고 시즌이 시작되는 봄부터는 평균 3개월분의 수요에 대비해 원자재 및 반제품 재고를 보유해왔다.

개성공단 폐쇄 전 물류의 흐름을 살펴보면 진글라이더의 주요 원자재는 대부분 유럽에서 공급받고 있으며, 일부는 한국에서 공급받고 있다. 진글라이더의 주요 구매처 정보는 (Exhibit 9)와 같다. 이 표를 통해 프랑스의 원단 업체인 NCV와 슈페어, 독일 산줄 공급업체인 에델리드의 비중이 85%에 이르는 것을 알 수 있고, 우리나라 공급업체들과의 거래 비중은 높지 않다. 한국의 원단 공급업체인 도미니코 텍스 교역은 캠핑장비 및 낙하산용 고급원단을 제조하는 회사로 프랑스의 NCV를 벤치마킹해서 원단을 생산하고 있는데, 국내에 생산설비를 갖추고 있고 NCV에 비해 제조원가 및 물류비용이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있어 최근에는 도미니코텍스교역으로부터 구매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원자재 구매에 있어서 수입 물량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은 이유는 패러글라이더가 항공장비이므로 FAI의 안전규격을 준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기용을 포함한 고성능의 패러글라이더일수록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까다로운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한다. FAI의 공식 경기에 참가하는 글라이더들은 일반적으로 경기 시작 90일 전에 공인된 기관들로부터 패러글라이더의 구조, 성능, 안정성을 규제하는 EN926인증을 받아야 하며, 최종적으로 모든 검사 대상 부문에서 완벽하게 인증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기종은 공식 대회에서의 기록을 인정받지 못하는 불이익을 받게 된다.

진글라이더의 인바운드(inbound) 공급사슬의 특징은 유럽 및 국내 업체들이 공급하는 원자재를 각각의 생산기지가 아닌 용인 본사로 운송하여 본사에서 다시 이 물품들을 개성과 칭다오로 보내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수입의 경우에는 항공운송을 통해, 내수 구매의 경우에는 육로운송을 통해 본사로 배송 되고, 본사에서 최초의 검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시스템은 유럽에서 주 생산기지인 개성까지 직접 배송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또한 안전 문제에 민감한 제품의 특성상 원자재 검수 및 관리에 대한 본사의 통제권을 높이는 동시에 수입 물류에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한다는 장점이 있다.

본사에서 검수한 원자재들은 인천항을 통해 칭다오로, 통일로와 통일대교를 거쳐 개성으로 배송되었다. 상대적으로 많은 양의 원자재들이 저렴한 물류비용으로 개성공단으로 보내지기 때문에 개성공단과 본사 간의 공급사슬에는 심각한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수입한 원자재를 용인을 거쳐 칭다오로 보내는 두 단계의 운송 과정은 불필요한 추가 비용을 발생시키고 리드타임(lead time)이 연장되어 공급사슬의 효율성이 저해되는 문제점이 있었다.

(Exhibit 10)은 개성공단 폐쇄 전 진글라이더의 아웃바운드(outbound) 공급사슬인 수출 물류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칭다오와 개성 공장에서 생산된 완제품들 역시 모두 용인 본사로 우선 입고된다. 용인에서는 양산된 완제품들 중 무작위로 추출하여 현장에서 다시 한 번 활공성능검사를 실시하고, 동시에 수출 물량 전량에 대하여 주요 모듈을 중심으로 재검수 및 포장 확인을 실시한다. 이렇게 검수를 통과한 제품들은 최종적으로 인천공항을 통해 전 세계의 총판매점들로 수출된다. 지역별 분포를 보면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 프랑스, 스위스 등 유럽 국가로 수출되는 물량이 진글라이더 전체 수출량의 약 60%를 차지하고 있다. 칭다오에서 생산된 제품들이 용인 본사를 거쳐 간다는 점에서 이 역시 물류의 비효율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Exhibit 11)은 진글라이더 주요 고객의 지역 분포와 거래 비중 및 운송 방법 등을 제시하고 있다.

진글라이더는 오존 같은 경쟁업체들과 달리 총판매점 중심의 B2B 유통망 전략을 고수하고 있으며, B2C나 총판을 제외한 다른 B2B(패러글라이딩 학교 등) 유통채널은 진글라이더가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는 기본원칙을 변함없이 지켜오고 있다. 결과적으로 진글라이더는 세계 67개국에서 유통 독점권을 가진 67개의 총판매점들과 거래하고 있다. 점주들 중 상당수는 패러글라이딩에 평생을 몸담아온 마니아들이거나 패러글라이딩을 통해 송진석과 인연을 맺게 된 오랜 친구들이다. 이들은 진글라이더의 가능성을 믿고 창업 초기부터 거래해온 업체들이어서 진글라이더와는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경쟁 업체들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총판 중심의 유통전략은 진글라이더가 한국에 본사를 설립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작되었다. 유럽에 본사를 두고 있는 경쟁업체들은 현지에 직접 물류창고나 배송센터를 운영, 보유하고 있다. 반면 진글라이더는 현지에 직접 물류 시스템을 구축할 만한 자본과 운영상의 노하우가 없었다. 따라서 유럽 현지에 총판매점을 통한 간접 유통망을 구축하고, 총판들과 밀접한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들의 유통망을 적극 활용하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이러한 간접 유통망은 회사 설립 초기에는 투자 대비 비용 측면에서 분명 유리한 점이 있었다. 총판매점 중심의 유통망으로 인해 국가별로 통합된 수요 관리가 가능해졌고, 구매 업체별 배치 단위로 생산물량을 관리할 수 있었다. 또한 총판은 세계적으로 앞서가는 진글라이더를 독점적으로 취급함으로써 각국의 시장에서 일관되고 차별화된 마케팅을 전개할 수 있었으며, 동종 산업 내의 다른 업체들과 과다경쟁 없이 일정한 수익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총판 중심의 전통적인 유통망은 소비자의 기호 변화와 니즈(needs)가 총판매점을 거쳐 온다는 점에서 시장의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특히 액세서리 제품들을 중심으로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판매량이 점차 증가하는 최근에는 보다 민첩하게 시장동향을 감지할 수 있는 유통망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진글라이더는 이러한 유통망의 구조적인 약점들을 각종 동호회 활동과 교육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보완해왔다. 패러글라이딩 산업은 전반적으로 현지의 기후와 경기변동 등 다양한 환경요인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정확한 수요예측이 어렵고, 여름과 겨울의 판매량 차이가 크게 나는 계절상품이다. 진글라이더는 시장 상황을 반영해 3개월의 계획 구간 내에서 완제품의 총괄 생산계획을 유연하게 조정해왔다. 이러한 생산의 유연성은 노동집약적 생산방식을 유지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또한 불확실한 시장 변화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배송 물류 역시 대부분 해상운송보다 항공운송을 이용하는 편이다.

진글라이더의 위기

패러글라이더가 활발히 판매되는 시기는 봄부터 가을까지이고, 겨울철은 비수기로 봄을 대비한 제품의 생산을 준비하고 신제품 개발을 마무리하는 시기이다. 겨울철에는 지표면의 온도가 낮아져 상승기류가 쉽게 형성되지 않고,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밤 시간이 길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에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산업의 휴지기인 겨울의 끝자락인 2016년 2월, 남북 갈등이라는 정치적 위험이 갑작스레 가시화되면서 진글라이더는 개성 공장 운영을 중단하게 되었다. 외부의 정치적 위기로 인해 진글라이더는 전체 가동 능력의 70%와 원가경쟁력이 있는 북한의 숙련된 인적자원들을 모두 잃게 되었다. 게다가 개성 공장에는 돌아오는 시즌을 대비해 만들어둔 완제품들과 3개월 동안 생산할 수 있는 원자재 및 반제품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 모든 재고자산을 몰수당하고 직원들은 맨몸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주 생산기지의 폐쇄로 인해 기존의 공급사슬 시스템은 사실상 붕괴되었으며, 당장 3월부터 늘어나기 시작하는 주문량에 추가 생산으로 대응할 수도 없었다. 특히 개성 공장은 칭다오 공장에 비해 효율성과 생산성 측면에서 훨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칭다오 공장은 개성 공장보다 생산량도 적고 생산품의 품질도 떨어진다. 특히 하네스의 경우는 개성에서만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칭다오에서는 당장 하네스를 생산할 수 있는 역량과 기반시설이 없었다.

“‘이제 다 끝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송진석에게는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지금의 공급사슬 단절을 해결하기 위해 고객들의 주문량을 재점검하고 원자재 조달, 생산 그리고 판매계획을 다시 수립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경쟁업체들의 주문량도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주요 공급선들을 재접촉하고 원자재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당장 어디서 다시 생산을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와 더불어, 스카이워크나 군소업체들이 채택한 아웃소싱 중심의 생산 방법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장기적으로는 개성공단에서의 생산이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전제하에 새로운 생산기지를 선정하고, 새 생산기지의 생산 능력을 결정할 필요가 있었다. 오존처럼 일부 자동화를 도입해 생산공정을 혁신하는 문제도 고민해볼 문제였다. 그에 따라 물류 시스템과 유통망을 포함한 전체 공급사슬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개성공단에 입주할 때 남북 관계로 인한 리스크를 계산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었다. 송진석의 머리는 점점 복잡해졌다.

Exhibit 1. 패러글라이더의 주요 모듈

Exhibit 2. 상승기 상세도

Exhibit 3. 주요 패러글라이더 제작 업체

Exhibit 4. 개성공단 폐쇄 전 진글라이더의 생산 업무 분장

Exhibit 5 . 진글라이더의 생산 공정 순서

Exhibit 6. 스피드라이딩

Exhibit 7. 개성 공단 폐쇄 전 진글라이더의 수입 물류

Exhibit 8. 진글라이더의 계절별 수요(2016~2017년)

Exhibit 9. 주요 구매처와 물량 정보

Exhibit 10. 개성 공단 폐쇄 전 진글라이더의 수출 물류

Exhibit 11. 주요 고객 지역 분포

* 기타 지역 거래비중 25%

 

 


[주석]

1. 아야지(あや地, 綾地, a figured or diagonally-woven twill fabric): 원래는 비단 계통의 직조물을 지칭하는 일본어였으나, 최근에는 통상 인장강도를 높이기 위해 대각선으로 직조된 섬유를 통칭하는 단어로 진화하였다. 텐트나 작업복 등의 원재료로 주로 사용된다.

2. 매일경제 “이카로스의 꿈을 디자인한다.”, 1996. 07. 19.

3. 출처: 대한민국항공회, http://www.fkaero.or.kr

4. 항공기가 어떤 침로(針路)나 궤도를 따라 지표면을 항주(航走)하는 평균속도. 대지속도는 ‘대지속력’이라고도 한다. 항공기의 지표면에 대한 상대 속도는 대기속도와는 전혀 다르다. 그 까닭은 비행하고 있는 대기(大氣)는 바람이 되고, 기류가 되어 지표면에 대해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흐르고 있는 냇물에서 어떤 속도로 진행하고 있는 배는 강 언덕에서의 그것과 다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과 똑같다.(출처: 두산백과사전)

5. 4개의 회사와 더불어 스페인의 니비우크(Niviuk)도 최근 각종 세계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브랜드이다. 하지만 니비우크는 자체 생산을 위주로 하기보다는 OEM 생산에 의존하여 기존 업체들로부터 납품 받아 판매하는 유통 중심의 비즈니스 모델을 유지하고 있어서, 자체 제조 수량이 상대적으로 적다. 또한 니비우크의 판매량이 기존 업체들의 생산량과 중첩되는 문제가 있어서, 본 사례연구에서는 니비우크를 분석 대상에서 제외키로 하였다.

6. 포뮬러 원(Formula One)의 약자로, 전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길고 권위 있는 자동차 경주 대회이다. 4개의 바퀴들이 모두 차체 밖으로 드러난 오픈 휠(open wheel) 형식의 경주용 자동차를 채택하고 있으며, 공식 명칭은 FIA(The 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l’Automobile: International Automobile Federation) 포뮬러 원 월드 챔피언십이며, 그랑프리 레이싱이라고도 한다.

7. 이 기술은 기본적으로 ‘2줄 디자인(two-line or two-riser design)’이라고 불린다. 산줄의 개수가 줄어들 경우 공기의 저항이 줄어 속도는 빨라지지만 안정성이 저하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때문에 다소 위험한 기술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존은 탄소섬유로 만들어진 보강재를 날개의 긴 횡단면에 장착함으로써 구조적인 안정성 문제를 기술적으로 해결한 것으로 사료된다.

8. 진글라이더의 브랜드와 디자인이 빨강으로 통일되어 있음을 강조하여 페라리에 비유함.

9. 출처: 통일부 북한정보포털 남북관계 지식사전, http://nkinfo.unikorea.go.kr

10. 출처: 통일부 북한정보포털 남북관계 지식사전, http://nkinfo.unikorea.go.kr

11.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태국의 5개 국가 공동체.

12.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 노르웨이, 스위스 4개국이 자유무역과 경제통합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1960년에 조직한 자유무역 경제 공동체.

13. 히말라야 산맥에 살고 있다고 주장되는 신비의 동물. 그 어원이 티베트어 ‘야테’에서 유래하였으며, 야테는 ‘바위 곰’이라는 뜻이다. 신장이 매우 크고 하얀 털로 덮인 설인으로 비유되기도 하며 수줍을 많이 타서 인간 앞에 잘 나서지 못한다는 전설 속의 동물이다.

14.  히말라야 산맥에 살고 있다고 주장되는 신비의 동물. 그 어원이 티베트어 ‘야테’에서 유래하였으며, 야테는 ‘바위 곰’이라는 뜻이다. 신장이 매우 크고 하얀 털로 덮인 설인으로 비유되기도 하며 수줍을 많이 타서 인간 앞에 잘 나서지 못한다는 전설 속의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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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진

신호정

신호정

신호정은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교수이다.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LG전자(금성사)에서 수출영업사원으로 근무하였 다.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MBA와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미국 노트르담 대학교에서 조교수를 역임하였다. 고려대 경영전문대학원 부원장으로서 『경영학연구분석센터』 설립을 주관하여, 세계 경영대학들의 연구 성과를 평가하는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우리나라 국가경쟁력의 뿌리는 제조업과 국제교역에서 비롯된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고객을 지향하는 시장 중심의 공급사슬관리 시스템에 연관된 다양한 주제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윤숙

이윤숙

이윤숙은 한양대학교 글로벌기업가센터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려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LSOM 전공 석박통합과정으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관심사는 SCM(Supply Chain Management), 신제품 개발,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 개방형 혁신(Open Innovation) 등의 분야이다. 2차 데이터를 활용한 다변량분석 및 패널분석을 주로 사용하며, 최근에는 기술경영 및 기업가 정신 분야의 사례 개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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