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의 흐름을 잡는 기업: 플로우 배터리의 선두주자 에이치투

에이치투(이하 H2)는 한신 대표가 KAIST 기계공학 박사연구실 동료와 함께 시작한, 국내 최초 장주기 에너지 저장 장치(long-duration energy storage system) 선두기업이다. 이들의 주력제품인 바나듐 플로우 전지(Vanadium Flow Battery, VFB)는 에너지 저장 측면에서 현재 대세인 리튬계(Li) 전지의 한계를 극복할 만한 차세대 기술로 국내뿐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인정받고 있다. VFB분야에서 H2는 국내에서는 경쟁자가 없고 전 세계적으로도 경쟁업체를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독보적인 경쟁력을 구축하고 있다.

하지만 2010년 창업 이래 13년 동안 H2가 걸어온 길은 자부심과 고난이 뒤섞인 기나긴 여정이었다. 플로우 전지는 높은 수준의 융복합 기술이 요구되는 딥테크(deep-tech)로서 공학박사인 한신 대표와 공동창업자 역시 이 분야에 대해서 거의 기초지식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열리지 않는 시장, 초기 투자금이 모두 소요된 첫 제품의 완벽한 실패, 전력산업의 복잡한 구조 등 수많은 어려움이 항상 H2가 걸어온 길에 함께 있었다.

H2는 독창적인 기술에 환호하는 이들과 의구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군분투해 왔으며 치밀한 투자전략, 시장성 증명, 적극적인 소통 등을 통해 다양한 난관을 극복해 왔다. H2가 겪어왔던 수많은 어려움과 고민은 장기적인 비전과 현실적인 어려움 가운데서 고민하는 기후테크 기업들이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다양한 상황에 대해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져준다.


Q1. H2는 향후 급격한 성장이 예상되는 에너지 저장 장치(ESS) 시장에서 국내 최초로 바나듐 플로우 배터리(VFB)를 개발하였고, 나아가 국내에서 유일하게 상용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VFB에 대한 H2의 압도적인 기술 역량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투자유치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H2가 이러한 어려움을 겪은 원인과 극복 과정에 대해 논의하시오.

Q2. H2는 설립 7년 만에 수주한 1MWh급 대용량 배터리의 시연을 한 달 앞두고, 커다란 기술적 난관에 봉착했다. 이에 한신 대표는 컨설팅 회사인 M사의 팀장인 당신에게 컨설팅을 의뢰하였다. H2가 당신에게 제공한 기술적 대안과 시나리오에 분석된 각 시나리오의 전략적 장단점, 그리고 향후 ESS의 시장 전망 등을 고려하여 H2에 적합한 시나리오를 추천하고 그 이유에 대해 논의하시오.

Q3. 전력산업 가치사슬 측면에서 H2의 시장진입 시 고려해야 할 전략적 요소들을 정리해보고, 글로벌(국내외 포함) 시장이라는 관점과 결합하여 향후 H2가 선택할 수 있는 성장전략에 대하여 자유롭게 논의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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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기 위해 시작했는데, 세상이 우리를 바꾼 것 같아.”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로 향하는 비행기 탑승구에 대기하고 있던 한신 대표가 부지런히 일정표를 확인하고 있던 허지향 이사에게 말했다. 12년. 허지향 이사가 KAIST 기계공학 박사연구실 동료였던 한신 대표에게 플로우 배터리(flow battery)라는 용어조차 생소한 아이템으로 창업 제안을 듣고 지금까지 흐른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눈 깜짝할 사이였다. 이들이 에이치투(이하 H2) 대전 본사에서 미국 캘리포니아의 주도1)로 향하는 이유는 미국 최대 규모의 바나듐 플로우 배터리(Vanadium Flow Battery, VFB) 건설 프로젝트 관련 킥오프(kick-off) 미팅2)을 진행하기 위해서이다. H2는 한국의 동서발전과 컨소시엄을 이루어, 컨소시엄 주관사로 세계 최대의 재생에너지 시장에 첫발을 딛는 것이다. H2에 주어진 임무는 그동안 H2가 진행했던 프로젝트 중 최대규모인 20MWh3) 규모의 발전소급 플로우 배터리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가 완공되면 H2는 미국 내 핵심 트랙 레코드(track record)4)를 확보할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장주기 대용량 에너지 저장 시스템(long-duration energy storage system) 업체 중 미국 내 가장 큰 규모의 바나듐 플로우 배터리를 설치했다는 위상을 선점하는 효과를 누릴 것이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신년 행사마다 죽음의 계곡 극복을 외치며, 직원들의 사기충천만을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한신 대표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믿기지 않았다. 21세기에 재생에너지의 바다에서 ‘캘리포니아 드림’을 보는 것일까. 이륙과 동시에 스쳐 가는 활주로를 보는 그의 머릿속에는 12년 동안의 순간들이 한 장면씩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진정한 탄소중립을 위한 조건

전기차를 비롯해 배터리에 저장된 전기를 동력으로 하는 제품들은 눈에 보이는 오염물질 배출이 없기 때문에 친환경적인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좀 더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하는 이슈가 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순수한 형태의 에너지인 전기 자체는 친환경적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전기의 ‘생산과정’과 생산된 전기를 저장했던 용기, 즉 배터리의 ‘후처리’이다.

전기에너지가 들판에서 자라거나 광산에서 채굴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전기생산을 위해서는 결국 다른 형태의 에너지(열에너지, 운동에너지, 위치에너지 등)에서 전기에너지로 전환, 즉 생산을 해주어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탄소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화석연료5)의 사용을 억제하고 전기 사용을 확대하기 위해 전기의 대량생산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전기에너지 생산과정에서 대량의 화석연료를 연소한다면 그것은 화석연료로 인해 발생하는 오염을 전기 생산 단계로 옮기고, 이를 친환경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것일 수도 있다. 즉, 탄소를 제품 사용 전에 발생시키느냐 혹은 사용 시에 발생시키느냐 고민하는 조삼모사식 해결책인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탄소중립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은 탄소의 배출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전기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배터리 폐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염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생산된 전기에너지를 사용한 후 배터리의 후처리 역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전기에너지는 일반적으로 전기를 저장하고 필요시 공급해 주는 기능을 가진 장치, 즉 소위 배터리(battery)를 통해 일상에서 활용되고 있다. 전기자동차, 휴대폰 등에 널리 활용되고 있는 리튬(Li) 배터리가 그 예시이다. 현재의 배터리는 충전식으로 대부분 일정 기간 이상의 사용이 보장되지만, 모든 배터리에는 감모율6)이 존재하며 결국 폐기되어야 한다. 문제는 이 폐기 과정에서 심각한 환경오염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요약하면, 깨끗한 방식으로 얻은 에너지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처리 과정에서 오염물질 배출을 최소화하는 것이 진정한 탄소중립을 이루기 위한 핵심 조건들이다.

 

재생에너지의 딜레마: 샤워실의 바보(fool in the shower room)

태양광, 풍력, 물 등은 자연계에 이미 존재하고 자연적으로 보충되어 재생이 가능한 에너지원이다. 따라서 이러한 에너지원으로부터 화석연료의 연소를 최소화하며 전기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는 에너지망을 구축한다면, 앞서 논의한 탄소중립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의 해결에 큰 진전을 이룰 수 있다. 이에 현재 전 세계적으로 재생에너지7)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하지만 오직 자연이 내어주는 것만큼만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다 보니 그 발전량은 간헐적이고 예측이 어렵다. 이러한 전력생산(발전) 단계의 비효율은 다시 송배전 및 사용 단계에서 순차적으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을 야기하고, 결국 에너지망 효율 저하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모든 변화에는 과도기가 필요하듯이 재생에너지의 확산 역시 기존 에너지와의 혼합 혹은 병행 과정을 거쳐서 진행된다. 하지만 현재의 재생에너지는 일명 ‘샤워실의 바보(fool in the shower room)’와 같은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샤워실의 바보란 1976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Milton Friedman이 처음 제시한 개념으로, 샤워실에서 차가운 물에 놀라서 뜨거운 물을 빠르게 틀고, 다시 너무 뜨거워서 차가운 물을 번갈아 트는 과정을 반복하는 이를 의미한다. 결국 원하는 최적온도의 물을 얻지 못하고 물과 시간만 낭비하는 바보를 의미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공공정책의 관리실패 혹은 일관성이 결여되어 야기되는 비효율성을 비판하는 개념이다.

가장 대표적인 재생에너지인 태양광의 예시를 살펴보자. 우리나라는 원자력과 석탄 같은 기저 발전원이 최소한의 기본 전력 공급을 담당하며, 전기수요에 따라서 천연가스가 이를 보조한다(Exhibit 1). 태양광 발전량이 풍부한 낮에는 전기의 과잉으로 인해 한국전력거래소가 재생에너지의 출력을 종종 제한한다. 전기가 과잉 공급되면 전력공급망에 과부하가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과잉 생산된 전력을 저장할 수도, 공급할 수도 없으니 발전원 자체를 차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녁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태양광 발전이 부족한 시간대에는 오히려 다시 천연가스와 같은 유료 에너지원으로 전력 공급을 채워야 한다. 충분히 생산되던 재생에너지의 발전을 중지시킨 후,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다시 추가 비용을 들여 천연가스 발전으로 전환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낮이 되면 다시 앞의 상황이 반복된다. 이것은 에너지 관리의 모순점으로 볼 수 있다. 즉, 재생에너지가 충분히 생산될 때는 전력수요가 부족해서 강제로 출력제한8)을 걸었다가, 전력수요가 증가하는 저녁시간에는 수요의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해 다시 천연가스 발전을 돌리고, 이후 다시 재생에너지의 생산으로 돌아가는 비효율적인 루틴(routine)이 반복되는 것이다.

 

재생에너지를 담는 마법그릇: 장주기 에너지 저장 시스템(long-duration ESS)

다행히 이러한 문제는 재생에너지로부터 과도하게 생산된 잉여 전기를 저장해 두고, 이를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 배분할 수 있는 에너지 저장 기술, 즉 배터리 기술의 발전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발전-송배전-사용으로 연결된 각 단계에서 발생하는 수급의 불균형이 해결된다면 낭비되는 전기에너지를 대폭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기를 저장하고 사용량을 자유롭게 조절하면서 꺼내어 쓸 수 있는 ‘에너지 저장 시스템(Energy Storage System, ESS)’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ESS는 직접 전력을 생성하지 않지만, 생산된 전력을 저장했다가 필요한 시점에 저장된 에너지를 출력함(방전)으로써 실제로 전력을 공급하는 발전소와 같은 역할을 하는 부분도 있다. 이러한 기능 때문에 ESS는 광범위한 의미에서 발전 기능을 포함하는 시스템으로 간주될 수 있다. ESS는 다시 방전 가능 시간을 기준으로 ‘단주기 ESS’와 ‘장주기 ESS’9)로 구분할 수 있다. 단주기 ESS는 전체 전력 시스템의 효율보다는 정전 등 단기적인 에너지망 교란에 대응하는 망의 ‘안정성(stability)’에 활용되며, 장주기 ESS는 전력 보관과 수요에 따른 공급이라는 역할을 수행하고, “발전-송배전-사용” 모든 과정에서 전력 사용의 효율성을 높여 망 전체의 ‘효율성(efficiency)’에 기여한다. 

따라서 간헐적이고 발전량의 예측이 어려운 재생에너지의 활용에는 장주기 ESS가 핵심 역할을 한다. 재생에너지를 통해 대용량 에너지를 생산하더라도 이를 저장할 방법이 없다면 필요한 순간에 즉시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장주기 ESS를 도입하면 전기 요금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시간대에 생산되는 전력이나 재생에너지를 저장하고 필요에 따라 활용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장주기 ESS는 재생에너지의 발전과 이용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배터리는 ESS 내부에서 전력의 저장과 출력을 조절하는 핵심 요소이다.

 

바나듐, 마법그릇을 위한 주문

2010년, H2를 설립한 한신 대표는 조선 관련 중공업 회사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장주기 ESS 시장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때마침 국제해사기구(IMO)는 이미 2013부터 향후 건조 및 운항될 모든 선박에 친환경 관련 규제를 적용하기로 발표하였다. 이에 한신 대표는 오랫동안 동고동락해온 KAIST 기계공학과 연구실 동료와 의기투합하여 바나듐(Vanadium)이라는 물질을 이용한 바나듐 플로우 배터리(Vanadium Flow Battery, VFB)로 리튬(Li)계 배터리가 지배하고 있는 ESS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기로 결심하였다. VFB는 일반적인 리튬 이온 배터리와 달리 액체 상태의 활물질(active material)10)을 사용하여 에너지를 저장하고 내보내는 시스템이다. 활물질은 전기화학적 반응을 통해 에너지를 저장하고 별도의 입출력 장치를 통해 필요한 곳에 전기를 공급한다.

VFB가 기존의 배터리와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특징은 에너지 ‘저장 용량’과 ‘전력 출력’이 별도로 조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배터리는 저장 용량이 커지면 전력 출력을 담당하는 부분 역시 자동적으로 비례하여 크기가 증가했다. 즉, 배터리 전체의 부피와 무게가 무조건적으로 증가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VFB는 전해질의 양이 에너지 저장 용량을 결정하고, 출력은 별도의 장치를 통해 조절할 수 있어, 저장 용량과 출력을 분리하여 관리가 가능하다. 즉, 더 많은 에너지를 저장하려면 전해질을 담은 탱크의 개수를 늘려 전해질의 양을 증가시키면 되며, 더 높은 전력 출력을 원하면 더 많은 스택(stack)을 설치하여 전극의 표면적을 늘리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듈리티(modularity) 기반 특성은 에너지의 저장 용량과 출력 빈도 측면에서 매우 높은 유연성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변동성과 간헐성이라는 문제점을 가지는 재생에너지의 저장 및 사용에 적합하다. 

자동차에 비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리튬 배터리를 사용하는 자동차의 경우, 더 많은 에너지를 저장하려면 배터리 전체 설비를 스케일업해야 합니다. 출력 장치까지 같이 커져야 하므로, 자동차 차체가 이에 맞게 커져야 하지요. 본질적으로 더 큰 차량을 구입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VFB의 경우, 더 많은 에너지를 저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전해질의 양을 늘리는 것뿐입니다. 즉, 연료통의 부피만 늘리고 출력량은 그대로 둘 수 있죠. 

– 허지향 H2 CTO(Chief Technology Officer)

리튬 ESS의 잦은 화재 문제로 최근 몇 년 동안 정부 지침에 따라 ESS 설치에 제약이 있었는데, VFB는 액체 화합물(전해액)이 주요 원료이기 때문에 화재의 위험이 원천적으로 없다. 지금까지도 H2의 제품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VFB 제품의 경우 단 한 건의 폭발과 화재 문제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이는 2017년 이후 수십 건의 화재가 발생한 리튬 배터리와 비교하여 매우 중요한 장점이었다. 추가로, 바나듐 전해액의 특성으로 용량 감모가 거의 없다는 장점이 있다. 전해액 속에 녹아 있는 바나듐은 화학적인 특성으로 인해 연감 감모율이 리튬 배터리보다 매우 낮은 수준이기 때문에 사용주기가 길고(20년 이상), 배터리 계약이 만료된 후 전해액 속 바나듐을 순물질 형태로 추출하여 철강산업 또는 또 다른 VFB에 재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Exhibit 2, 3). 이러한 특성들로 인해 VFB는 재생에너지와 연계하여 사용하게 될 경우, 청정에너지원으로부터 전기를 생산하고 이후 배터리의 후처리에도 환경적으로 처분할 수 있기 때문에, 국내외적으로 향후 발전소를 대체할 장주기(long-duration) 대용량 ESS에 적합한 기술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이상적인 결과를 추구하기 위한 연구실의 현실은 전혀 녹록지 않았다. H2 창업자 그룹 대부분은 공학 박사였지만, 플로우 배터리 전공자들은 아니었다. 사실 ‘플로우 배터리 전공자’라는 말 자체가 당시로서는 가능하지 않은 개념이었다. 액체를 사용해 에너지를 저장하는 배터리는 전기화학공학, 소재공학, 전기전자전파공학, 기계공학, 소프트웨어공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높은 수준으로 집결된 딥테크(deep tech)의 영역이었다. 당연히 개인이 모든 지식을 보유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설사 분야별 전공자들을 모두 모았다고 해도, 한신 대표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VFB가 저절로 설계되고 제작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설계기준 자체가 전무했기 때문에 한신 대표와 공동창업자들은 아무런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표준을 만드는 작업에 직면했다. 참조할 만한 기존 제품이 없었기 때문에 ‘역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12)이라는 방법조차 사용할 수 없었다. 즉, 소위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직접 시도해봐야 했다. 수많은 논문과 실험으로 밤을 새웠지만, 10번을 시도하면 9개는 실패로 끝났다.

MBA 수업에서 배웠던 ‘죽음의 계곡’이라는 표현이 딱 떠오르더라고요. 초기에 받은 투자금은 이미 고갈되어 가는데, 개발 일정은 지연되고 4~5년이면 성숙할 것만 같았던 시장은 아예 그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어요. 나중에는 죽음의 계곡이라도 제발 존재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죠.

– 한신 H2 대표

 

탄소중립 시장: 신세계 vs. 신기루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시장의 불확실성이었다. 물론 장기적 관점에서 재생에너지와 VFB의 시장 전망은 밝아 보였다. 국제에너지기구(International Energy Agency, IEA)의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재생에너지는 전 세계 발전량의 약 26%를 차지하며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핵심 기술로 인정받고 있다. 재생에너지 산업의 확대와 함께 에너지 저장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VFB 시장은 안전성, 효율성, 친환경성 등의 이점을 기반으로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 시장조사기관인 Verified Market Research에 따르면, 글로벌 VFB 시장은 2020년 1.7억 달러에서 연평균 18.4%씩 성장하여, 2028년에는 7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Exhibit 4). 국내의 경우 2022년 기준으로 총 10MWh의 상업용 VFB가 설치되어 있으며, 현재 재생에너지의 잦은 출력 제한으로 인해 재생에너지의 효율적 활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제주도 지역에만 총 160MW의 장주기 ESS 도입이 예정되어 있다. 또한 한국전력도 세계 최대 규모의 해상풍력발전소(8.2GWh)가 들어서는 서남해 지역을 위한 장주기 ESS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2023년 산업부의 10차 전력 수급 계획에 따라 2036년까지 국내에 26.3GW 규모의 에너지 저장 시스템(ESS) 설비를 구축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이를 위해 최대 45조 원의 투자를 예상하고 있다. 

시장 측면에서는 국가 전력망에서 재생에너지가 늘어나면서 ESS의 중요성은 워낙 크게 부각되고 있는 부분이 있어요. 안전성 문제도 있어서 리튬 계열 ESS만으로는 시장의 확장성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결국 다른 장주기 배터리 기술이 필요하다고 저희는 생각했고 그중에서 기술성숙도가 제일 높은 게 VFB였지요. H2의 경우 한국에서는 독보적으로 굉장히 긴 시간 동안 연구개발을 선도적으로 해 오셔서 그런 부분에 기술적인 진입 장벽이나 차별성이 확실히 있다고 봤습니다.

– 박인원 인비저닝 H2 투자심사역

하지만 H2와 투자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밝은 전망이 아니라 사업을 궤도에 올려놓고 수익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2015년이면 이미 형성이 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재생에너지 시장은 도무지 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업화와 시장 형성에 대한 장벽은 여전히 높았다. 기술적 참신함과 우수성을 강조해 보았지만, 시장이 열리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투자자와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힘들었다. H2 앞에 놓여있던 문제는 단순히 배터리 시장이 열리느냐 마느냐가 아니었던 것이다.

H2의 제품인 VFB가 시장성을 얻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선행조건이 전제되어야 했다. 첫 단계로 탄소중립 시장의 개방이 필요한데, 이는 국가가 공식적으로 탄소중립을 선언해야만 가능하다. 그 이후 탄소중립 시장의 개방과 친환경 에너지에 대한 국가적, 사회적 관심을 기반으로 실질적인 재생에너지 수요가 창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재생에너지에 대한 기본 인프라 구축과 전력망 운영에 필요한 실수요가 등장하고 실질적인 정책적 지원 등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비로소 에너지망의 효율적 운영을 위한 장주기 ESS 시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완료된 후 VFB가 장주기 ESS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Exhibit 5). 우리나라의 경우 H2 설립 후 무려 10년 만인 2020년에야 비로소 첫 단계인 탄소중립 선언이 이루어졌다.

 

투자유치의 비밀: 원칙을 정립하라

장주기 ESS의 시장 전망은 확실하게 밝았으며, 이는 그간 만났던 대부분의 투자자들도 동감했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밝은 전망이 깐깐한 투자자들의 주머니를 열어주지는 않았다. 신기술에 대한 감탄과 격려가 한신 대표가 경험한 호응의 한계선이었다. 그의 전문성과 진정성 있는 호소에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실질적인 투자로 진전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창업팀의 역량과 신뢰가 부족했던 것일까? 과신은 아니지만, 한신 대표는 자신과 공동창업자들의 역량에 대해 확신이 있었고, 실제로 업계 평판도 좋았다. 하지만 뭔가 충분하지 않았다. 시장의 전망성이 충분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시기가 문제일 뿐 시장의 전망 자체는 이미 투자업계에서도 상수가 된 지 오래다. 깊이 고민하던 그는 투자유치에도 분명한 전략적 방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H2를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인 대상으로 보이도록 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한신 대표가 내린 해답은 ‘시간과 안정성’이었다. 대다수의 투자자들에게 투자회수에 대한 시간은 매우 중요하며, 이는 기관 투자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정부가 공인한 확실한 시장과 우수한 기술력이 있어도, 그것이 ‘나’의 투자회수율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투자자들은 망설이게 된다. 또한 투자자들은 마침내 시장이 열렸을 때 본인들이 감내한 인내에 대한 보장된 보상을 원했다. 이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통해 한신 대표와 경영진은 네 개의 투자유치 대원칙을 설정했다(Exhibit 6).

다행히 만기가 없는 산업은행과 10년짜리 신규 펀드를 조성한 KB인베스트먼트로부터 투자를 유치하여 숨통이 틔었다. 이에 한신 대표를 비롯한 H2의 경영진들은 아직 시기가 오지 않았을 뿐, 결국 형성될 시장이라면 그때를 준비하여 차곡차곡 기술적 진보를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시장에서 트랙 레코드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죽음의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정도의 길이라고 믿었다. 아직 본격적인 시장이 열리지 않았을 뿐 이미 투자자를 비롯하여 공기업, 혹은 민간의 얼리어답터(early adapter) 사이에서 H2의 기술력과 제품은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한신 대표는 시장이 없는 상황에서 제품을 개발하고 판매하는 데 주력했다. 누구나 제품을 팔려면 시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한신 대표는 시장이 없는 상황에서도 제품 개발을 진행하고, 그 과정에서 시장에 대한 필드 테스트14)와 데모 설치15)를 계속하였다. H2는 데모나 연구 개발 과제에 많은 비용을 들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시장이 없는 상황에서도 H2는 트랙 레코드 확보가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투자자 및 미래 고객들에게 H2가 가진 잠재력을 보여주는 신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필드 평가나 데모의 규모와 관계없이, 민간이든 공공이든 작은 기회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중요한 것은 조금이라도 향상된 성능의 제품을 지속적으로 선보이며, 시장에 향후 기술적 완성도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H2의 홈페이지에서 ‘News’란을 검색해 보면, 2012년 첫 기사 이후 2023년 6월까지 90여 개의 기사가 게재되어 있는데16) 대부분 새로운 제품의 출시 및 기관, 공원, 기업 등 다양한 장소에 H2의 제품이 설치되었다는 뉴스이다. 중요한 것은 시장에 대한 소식을 투자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H2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고, 시장이 열리는 순간 선두주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대내외에 알리는 것이었다.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제품을 만드는 데 2억이 들었으면서 1억 8천에 파는 것은 미친 짓이야’라는 생각을 갖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의료계에서도 임상실험에 참여하는 경우, 오히려 실험참가자에게 돈을 지불하잖아요. 가능성을 보고 일을 진행하는 투자의 일종인 것이죠. 만약 우리가 미래에 수천억 원의 시장을 만들 수 있다면, 지금 당장 2~3천만 원의 손해를 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죠. 어차피 당장 수익을 창출할 시장이 없는 상태에서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는 것은 오히려 전략적 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 한신 H2 대표이사

 

죽음의 계곡을 넘어 도착한 절벽

회사를 설립한 지 무려 7년이 지난 2017년,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대용량 배터리의 첫 수주에 성공했다. H2가 그동안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1MWh의 대형 배터리였다. 용량이 1/10인 100kWh의 배터리까지는 개발이 완료된 상태에서 대용량화(scale up)에 도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고, 이 시제품 시연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그동안 H2의 신년사마다 단골처럼 등장했던 ‘죽음의 계곡 극복’을 더 이상 외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한신 대표는 망설이지 않고 프로젝트를 수주했고, 회사 전반에 다시 한번 도전하는 활기가 불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품 시연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공동창업자이자 기술총괄(CTO) 허지향 이사에게 들려온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한신 대표는 두 귀를 의심했다.

“대표님, 연결된 배터리 내에서 지속적으로 누전이 발생하고 있는데 현재로서는 원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럴 수가 있을까?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보통 이때쯤 되면 한 번 정도는 해피엔딩이 나와줘야 하는 것 아닌가. 절망감보다는 허탈함 때문인지 언제나 긍정적이고 확신에 차 있던 한신 대표조차 이 순간만큼은 망연자실한 감정에 휩싸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1MWh 용량의 배터리 제작을 위해서는 100kWh 용량 배터리 10개를 연결해야 한다. H2는 이미 3개의 배터리를 효과적으로 연결한 경험이 있었다. 시물레이션을 통한 결과도 확보하였다. 무려 300억이라는 누적 투자액을 통해 얻은 지식과 경험이었다. 하지만 10개의 배터리를 연결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로 다가왔다. 전력 변환 장치(Power Conversion System, PCS)와 연결 문제가 동시에 발생했다. 전력을 배터리에 저장하거나 내보내기 위해서는 PCS를 통해 전기의 전압을 변환하게 된다. 다량의 배터리를 연결하는 과정에서 높아진 전압은 PCS 내 누전 문제를 발생시켰고, 이는 ESS 내 에너지 관리 시스템(Energy Management System, EMS)과의 통신 장애, 배터리 충전 상태를 나타내는 SOC(State Of Charge) 측정오차, 그리고 배터리 간의 연동성 저하라는 문제점 등을 차례로 발생시켰다(Exhibit 7).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많은 경험과 축적된 제반지식이 필요했지만, 당시 H2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으로는 위에서 나열한 문제의 현상을 파악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이 과정에서 실제 설치와 시뮬레이션 간의 차이를 발견하게 되면서 시뮬레이션의 한계도 체감할 수 있었다. 시뮬레이션은 기본적으로 이론을 배경으로 설계자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와 요인들을 입력한 범위 내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시뮬레이션에 포함되지 않았던 요소로 파악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배터리를 고전압으로 연결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결함이 그 예였다. 시뮬레이션에서는 문제가 발생할 상황과 위치를 예측할 수 있는 요소가 포함되지 않았기에, 실제 시스템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이해하거나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이 없었다.

그 시기를 떠올리면, 숙제를 제출하고 뒤돌아서는 학생처럼 그냥 일을 끝내고 싶던 기억이 납니다. 대표님은 심적으로 힘드셨을 거라 생각하지만, 저도 정신적인 측면뿐 아니라 체력적으로 정말 힘들었어요. 매일 새벽 2~3시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일이 계속되었지요. 그때 회사 규모도 작았기 때문에 실제로 제 손으로 시제품을 하나하나 만들었거든요. 조립하는 일이나 다른 작업들도 동시에 하면서 육체적인 노동과 정신적인 피로가 겹쳐, 그냥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진짜 이거는 됐다, 이만하면 됐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어요.

– 허지향 H2 CTO

하지만 회사를 운영하는 한신 대표에게는 좌절하는 시간조차 사치였다. 쓰러질 것 같은 허지향 이사를 다독여서 돌려보낸 후, 한신 대표의 머릿속에는 그동안 묵묵히 지원해 준 수많은 투자자들, H2의 노력을 인정하고 기회를 준 발주처 관계자들, 한 줄기 희망을 본 직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와 동시에 문제 해결의 가능성 및 기간, 비용에 대한 생각까지 더해져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도대체 어떤 선택을 해야 그동안 믿고 따라와 준 모두에게 전해질 실망감을 최소화할 수 있을까? 이 절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할까?

 

단순한 거짓말보다 어려운 정직함의 기술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대표에게 부여된 과제였다. 우선 내부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기술적 실패 원인에 대해 회의가 거듭되었다. 실패 원인을 분석하고 가능한 대안들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기술적 난이도, 예상 소요 기간 및 비용을 고려하여 크게 두 가지 방안으로 좁혀졌다(Exhibit 8).

플랜 A는 누전이 발생하는 패턴을 파악하고 특수 재료를 사용하여 누수를 차단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기술적 난이도가 크게 높지 않지만, 패턴 파악을 위해 충분한 데이터와 분석 능력이 필요하다. 비용은 대략 2억 원 정도, 시간은 2개월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는 재료 구매와 데이터 분석, 테스트 과정, 그리고 시스템의 개선 작업에 소요되는 비용과 시간을 고려한 것이다. 물론 인건비와 연구센터 운영비는 별도로 더해질 것이다.

플랜 B는 기존의 배터리 구조를 전면 점검하고 제품의 구조 자체를 재설계하는 것이다. 제품의 각 단계를 분리해서 점검하고 문제점을 분석하여 결합 구조를 변경하는 것은 전면적인 제품 재설계를 필요로 한다. H2의 누적된 지식이 일정 부분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기술적 불확실성이 크다. 인건비와 연구센터 운영비를 제외해도, 재료 비용만으로 약 15억 원이 소요되며, 시간적으로는 최소 8개월, 최악의 경우 1년까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내부적으로 기술적 대안에 대한 평가를 마친 후 경영진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섰다. 바로 현 상황을 다양한 이해관계자들(투자자, 발주처, 사내 직원들)과 어떻게 공유하는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는 본질적으로 정보의 은폐나 왜곡의 문제가 아니었다.

VFB 제품은 국내에서 H2가 유일한 업체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경쟁사는 다섯 손가락에 꼽는 특수제품군이다. 따라서 H2와 외부 기관은 물론 심지어 H2 내에서도 핵심 기술진과 타 부서 간 정보격차(information asymmetry)가 매우 크다. 무엇보다도 핵심 기술진조차 당면한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해서 불확실성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신 대표의 주요 고민은 정보격차와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정보를 공개해야 하는가였다. 정직은 열정과 함께 한신 대표를 여기까지 이끌고 온 신념 중 하나였다. 하지만 불확실한 정보는 정직하게 공개할 정보 자체를 허락하지 않는다. 문제 자체에 대한 정보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어떻게 모두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그의 복잡한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무계획적인 정보 공개로 섣부르게 대응한다면 오히려 투자자, 발주처, 그리고 무엇보다 H2 내 직원들 사이에서도 혼란이 가중되어 오히려 사업 자체가 좌초될 수 있는 위험이 높았다. 정보격차가 큰 상황에서 무차별적인 공개는 오히려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불필요한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이것이 투자자, 제품을 발주한 공기업 관계자, 그리고 회사와 함께해온 내부 구성원들에게 최선의 선택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는 한신 대표 개인의 좌절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꿈을 안고 달려온 모두를 패배자로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마라톤 회의가 진행되었고 두 가지 시나리오가 도출되었다. 

시나리오 1은, 우선 플랜 A의 방안으로 대안을 선택한 후 이를 투자자와 사내 핵심 개발진에게 우선적으로 공시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플랜 B로 이동하는 단계적 시행 방안이었다. 이 시나리오의 전략적 장점은 명확했다. 우선 성공할 시 시간과 비용 측면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하였으며, 투자자의 불안과 사내 불만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개선에 집중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미 한계 상황까지 와있는 직원들의 사기진작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듯했다. 기대감과 꿈을 믿고 달려온 것은 한신 대표와 투자자만이 아니었다. 많은 어려움과 불확실성 속에서 드디어 시장화를 앞둔 직원들의 열망 또한 이들 못지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컸을 것이다. 이들이 동요하거나 이탈한다면 회사 자체가 없어지고 신용이나 기술력도 결국 공염불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단점 역시 작지 않았다. 플랜 A에서 플랜 B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정보의 은폐에 대한 오해 혹은 의혹이 제기될 수 있고, 총 비용도 결국엔 더욱 증가할 것이다(2억+15억+α).

몇 년을 희망고문으로 버텨왔죠. … 아까 말씀드린 탄소중립과 장주기 ESS시장이라는 것 자체를 7~8년 동안 계속 내년이면 된다고 되뇌면서 버텨왔는데 제품화가 더 늦춰진다면, 당시로서 회사 내 직원들 분위기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정말 일촉즉발의 그런 느낌이었어요.

– 한신 H2 대표이사

시나리오 2는, 바로 플랜 B의 방안으로 대안을 선택한 후 이를 투자자, 고객, 사내 직원 전체에 일괄 공시하고 문제해결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이 시나리오의 전략적 장점 역시 명확했다. H2의 신뢰성이 강화될 수 있고, 설사 최종적으로 실패하더라도 최소한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점이 실패가 용인되거나 재도전의 기회가 보장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다. 반면 단점 역시 명확했다. 아니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도 H2의 현 상황을 외부에 노출함으로써, H2의 기술개발 전략 및 단계가 잠재적 경쟁사들에 노출되고, 이에 따라 많은 후발주자가 H2가 개척해온 시장에 뛰어들 가능성도 있다. 사실 이 점이 바로 많은 기업이 ‘신뢰’라는 아름다운 단어에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주요 이유이다. 아름다운 단어가 기업의 생존을보장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VFB에 대해 H2와 투자자 및 고객과의 정보격차가 크다는 것도 문제이다. 수년간 개발해온 제품이 시연을 한 달 앞두고 전면 재설계를 해야 한다고 하면, H2의 기술 역량에 대한 신뢰의 상실로 이어져 시장에서는 H2에 대한 사망선고를 내릴 수도 있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추가 투자 및 잠재고객의 이탈로 이어질 것이다. 압도적으로 높은 비용과 시간은 앞서 언급하였던 내부 직원들의 사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임이 자명했다. 오히려 투자자보다 내부 직원들부터 먼저 설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야 할 수도 있다(Exhibit 9).

단순한 정보의 오류나 실수였다면, 심지어 능력의 한계라도 얼마든지 인정하고 함께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단순히 정보의 공유가 아니라 회사의 앞날, 그를 믿고 따라와 준 투자자와 직원들, 그리고 선두주자로서 어렵게 개척한 플로우 배터리라는 시장의 가능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상황이었다. 최선의 해결책을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공개되는 정보의 정확도와 대응 방안, 설득 대상의 전문성 및 설득 방법이 모두 고려되어야 한다. 정보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과 기업의 경쟁력 보호, 비용 및 자원 사용, 그리고 기대치 관리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마침내 도착한 드넓은 재생에너지의 바다

한신 대표의 회상은 마침내 정부가 탄소중립을 선언한 2020년에 이르렀다. 가슴을 쓸어내렸던 2017년 대실패 이후 3년의 세월이 지난 시기였다. 이 기간은 암흑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절치부심의 시기이기도 했다. 커다란 기술적 실패를 극복하고 결국 안정적인 대용량 장주기 ESS를 개발하기 위한 인고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안정적인 성능 구현이 시장에서의 성공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장으로 가는 자격을 얻은 H2의 다음 과제는 시장의 확장이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탄소중립에 대한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재생에너지 시장의 다양한 모습들이 베일을 벗기 시작한 때이다. H2에게 중요한 것은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신대륙과 같은 재생에너지 시장에서 H2의 역할과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다. 재생에너지 시장은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이제 막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만큼 우수한 ESS 기술을 보유한 H2에게는 무한한 기회의 땅이기도 했지만, 자칫 초반에 방향 설정을 잘못하면 망망대해에서 목표를 잃고 표류하는 난파선이 될 수도 있었다. 오늘은 H2가 캘리포니아 정부의 사업을 수주하였지만, 내일은 얼마든지 새로이 등장한 다크호스에게 그 자리를 내어줄 수도 있는 것이다. 다행히 H2는 그동안 공격적인 수주 전략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시장을 경험해볼 수 있었고, 산업 가치사슬과 국가라는 두 가지 기준을 세웠다.

첫 번째는 전력망을 구성하는 산업가치사슬 중 어느 영역에 집중해야 하는가이다. 에너지를 저장하고 출력을 조절할 수 있는 장주기 ESS는 기본적으로는 모든 단계의 에너지 효율화에 기여할 수 있다(Exhibit 10).

H2는 먼저 단계별로 고려해야 할 전략적 요인에 대해 분석하였다. 먼저, 발전 단계에서는 과잉 생산된 전력을 효율적으로 저장하였다가 필요시 출력을 하는 발전소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송배전의 단계에서는 전력출력을 조절하여 과잉 송전 문제를 해소하고 과부하의 위험을 방지하여, 전력의 품질 및 신뢰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 이러한 발전과 송배전상의 향상된 효율은 소비자로 하여금 더욱 균일한 전력을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한, 사업장 혹은 가정에 자체적으로 ESS를 구비할 경우, 자체 설치한 재생에너지 설비(예: 태양광 패널)에서 생산되거나, 송전망에서 과잉 공급된 전력을 저장했다가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 잠재적 전기 요금을 절감할 수 있다. 실제 모든 단계의 시장은 높은 성장성이 예측되고 있다(Exhibit 11).

이 중 시장 형성의 측면에서는 발전 단계가 가장 앞선다. 우선 재생에너지를 활용한 발전은 정부의 정책 주도로 형성되는 시장이고, 이에 호응하는 업체에 대해서는 무리한 원가절감을 요구하지 않는다. 특히 캘리포니아주 정부가 발주한 사업과 같이 발전 단계로의 진입은 정부의 지원과 신뢰를 획득하였다는 의미이며, 이는 매우 강력한 트랙 레코드를 형성할 수 있다. 다만, 발전단계에 가까울수록 잠재적 최종 시장의 규모는 제한적이며, 상대해야 하는 이해관계자들의 영향력이 높다. 기술적 실패 시 짊어져야 하는 위험부담도 높은 편이다. 다음 표는 H2가 산업가치사슬에서 단계별로 고려해야 하는 전략적인 요인들을 정리한 것이다(Exhibit 12).

두 번째는 국제화 전략이다. 트랙 레코드를 위한 국제시장 탐색 중, H2는 국가마다 시장의 성장성, 전력 시스템, 전기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이 또한 기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hibit 13). 예를 들어, 미국과 같이 전 세계 첨단기업들의 경쟁이 치열한 국가에서 발전 단계의 계약을 수주한다면, 그 자체로 H2가 시장에 보내는 신호는 엄청날 것이다. 독일의 경우, 사용자들이 이미 고가의 전기세에 적응하고 재생에너지에 대한 인식이 발달하여 잠재적 시장 규모가 큰 사용자 시장의 진출이 유리할 수도 있다. 또한, 호주와 같이 발전과 송배전이 하나로 묶인 형태로 관리되는 시스템에서는 발전 단계로의 진출이 곧 산업가치사슬 전체로 쉽게 확장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현재 H2는 국내의 경우 발전 단계에만 집중하고 있다. 한국의 사용자 시장은 전기 요금이 저렴한 상태가 오랜 기간 지속되어 왔기 때문에 가격상승에 대한 저항력이 높아 재생에너지 시장이 쉽게 진입할 수 없는 상황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단기간에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다만, 개인이 아닌 일정 규모 이상의 전력을 사용하는 사업자들에게는 탄소중립을 위해 ESS 설치가 법적으로 의무화될 수 있다. 이 시장은 자생적인 시장이 아닌 정책에 의해 형성되는 시장이긴 하지만, H2의 입장에서는 기회이기도 하다. 해외 시장의 경우 현재 미국에는 발전 단계, 독일에는 사용자 단계, 호주에는 발전과 송배전을 동시에 진입하는 시장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캘리포니아행 비행기 안, 창가 쪽에 앉은 한신 대표의 눈앞에는 푸른 태평양 바다가 말 그대로 망망대해처럼 펼쳐져 있었다. 망망대해는 무한한 기회의 공간이자 표류의 공간이기도 하다. 죽음의 계곡과 기술실패의 절벽을 넘어 마침내 H2가 도착한 재생에너지 시장이라는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10년 동안 고요하기만 했던 이 바다에서 묵묵히 튼튼한 배를 만들고 기다렸던 H2호에 마침내 대항해를 위한 순풍과 파도가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 바다 아닌가. 한신 대표의 눈은 다시 수평선 끝을 향하고 있었다.


[주석]

1) 미국의 각 주에서 수도 역할을 하는 도시를 뜻한다.

2)   프로젝트 팀과 고객이 목표와 일정 등을 조율하기 위해 가지는 첫 미팅을 말한다.

3)   1MWh는 4인 가족 기준 약 65가구가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전력량이다(4인가구 월평균 전기사용량 기준).

4)   기업의 사업실적을 의미한다.

5)   석탄, 석유, 천연가스 등의 천연 에너지자원이다.

6)   자연스럽게 줄거나 닮는 비율을 의미한다.

7)   햇빛, 물, 바람, 지열 등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적으로 보충되어 재생 및 지속이 가능한 에너지원을 말한다.

8)   출력제한은 전기생산이 과도할 때 전력거래소가 특정 발전원에 전력생산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거나 줄이라는 지시를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9)   4~12시간 이상 방전이 가능한 에너지 저장 장치이다.

10)  전지가 방전할 때 화학적으로 반응해 전기에너지를 생산하는 물질을 의미한다.

11)  발전 설비의 전 수명주기(건설부터 폐기까지)에 걸친 비용을 집계한 것이다.

12)  이미 제작되어 있는 (타사의) 제품을 분해해서 제품의 구성원리를 역추적하여 밝혀내는 것을 뜻한다.

13)  사전에 접촉한 적이 없는 대상(고객, 투자자)에게 사업적 관계를 제안하는 요청을 의미한다.

14)   지정된 기간 동안 제품을 대여받아 제품에 대한 평가 및 사용후기를 받는 테스트이다.

15)   제품을 시범으로 전시하는 것을 뜻한다.

16)   http://www.h2aec.com/kor/news_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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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진

최병철

최병철

최병철은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외국어대학교 창업지원단장 및 AER지식연구소 공동 소장을 맡고 있다. 학부에서 기계공학을, 대학원에서 기술경영을 전공하였으며, 기술혁신 전략을 주제로 경영학 박사학위(경영전략)를 취득하였다. 이후 기업벤처링(Corporate Venturing), 기술경영(Technology Management) 분야에서 활발하게 연구, 강연, 정책 프로젝트 등을 진행하고 있으며, Organization Science, Journal of International Business Studies 등 다수의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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