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아가는 이들 – LetinAR

AR 글래스는 가상 콘텐츠를 눈앞에 띄워 현실과 겹쳐 보이게끔 해준다. 구글, 앱손, 마이크로소프트, 매직리프 등 많은 기업이 글래스 형태의 기기들을 내놓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모든 AR 글래스는 이러한 초점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한 기업이 한국에서 등장했다. 우연한 기회에 접한 핀 미러(Pin Mirror)를 통해 사용자가 어느 곳을 보든 또렷한 이미지를 볼 수 있게 하는 광학계(光學系)를 만들어 낸 기업, 바로 LetinAR가 그 주인공이다. 2018년 CES에 참여한 후 LetinAR는 투자와 협력, 제휴와 관련된 제안들이 쇄도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국에 돌아오자 투자자들이 먼저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LetinAR은 투자자와 투자 금액, 투자 조건을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LetinAR은 이제 새로운 단계의 도약 앞에 서 있다.

본 사례는 LetinAR가 AR 글래스의 ‘초점’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초기 기술 스타트업의 가치 산정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스타트업이 투자를 유치할 때 고려해야 하는 변수들에 대해 고민할 수 있다.


Q1: 극초기 기술기업에 투자하는 투자자들은 어떤 기준에 따라 투자 의사결정과 가치 산정을 진행하는가?

Q2: LetinAR의 창업자들은 창업 과정에서 어떠한 주요 의사결정 단계를 거쳤는가?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점은 어디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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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inAR – 쌓아가는 이들

네 명의 직원이 돌아가며 방문객을 응대해도 찾아오는 이들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2018년 1월 라스베이거스의 CES에서 글로벌 대기업들의 눈을 번뜩이게 한 기업이 있었다. 부스를 찾은 방문객들은 ‘정말 그 문제를 풀었대?’, ‘어떻게?’라는 눈빛이었다. 마치 수학 난제를 풀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모여든 수학자들의 눈빛 같았다. 전시 부스 밖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이들은 재빠르게 휴대폰을 꺼내 검색했다. 도대체 이 기업은 어디서 왔으며, 어떠한 역사를 갖고 있는 기업인지 검색해봤지만 별다른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기업이 AR 글래스의 초점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제품을 돌아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일반적으로 문제 해결 시 제품의 복잡도는 상승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들이 선보인 제품은 딱히 부품이라 할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단순했다. 어느 기업도 해결하지 못했던 AR(Augmented Reality) 글래스의 난제 ‘초점’을 해결한 기술. 그것이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초점이란 사물을 볼 때 그 사물이 또렷이 보이는 지점을 말한다. 초점은 물체와 관찰자 사이의 거리에 따라 다르게 형성된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은 모든 거리의 사물을 전부 또렷이 볼 수는 없다. 이는 사람이 가진 눈의 구조적 한계이다. 손가락 하나를 눈앞에 펴보자. 손가락에 초점을 맞추면 그 뒤의 배경은 뿌옇게 보인다. 반대로 멀리 떨어진 물체에 초점을 맞추면 가까이 있는 손가락이 뿌옇게 보인다. AR 글래스는 가상 콘텐츠를 눈앞에 띄워 현실과 겹쳐 보이게끔 해준다. 구글, 앱손, 마이크로소프트, 매직리프 등 많은 기업이 글래스 형태의 기기들을 내놓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모든 AR 글래스는 이러한 초점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글래스에 뜬 정보를 보는 동시에 안경 밖 사물들을 뚜렷이 보는 것이 불가능했다. 반대로 시선을 밖에 두면 글래스에 뜨는 정보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안경 밖 세상과 안경 위의 정보를 번갈아 보는 수밖에 없었다. AR 글래스는 증강현실을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이었지만 초점 문제로 인해 가상과 현실은 쉽게 결합되지 못했다. 그런데 재작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한 기업이 한국에서 등장했다. 놀랍게도 그 기업은 대기업이 아닌 스타트업이었다. 사용자가 어느 곳을 보든 또렷한 이미지를 볼 수 있게 하는 광학계(光學系)를 만들어 낸 기업. 당시 이 회사의 직원은 겨우 두 명이었다.

이 회사의 CEO 김재혁과 CTO 하정훈은 고등학교 동창이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던 둘의 관심사는 독특하게도 ‘과학’이었다. 둘은 과학과 기술이라는 주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재혁과 하정훈은 그들의 창업이 고등학교 시절 그 대화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회상한다.

“우리는 가끔 미래에 전화기가 사라지는 모습을 상상해 봤어요. 전화기가 없어지면 어떤 기기가 우리 생활에 들어올지를 생각해 봤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미래의 디스플레이 기술이 어떻게 발전할지도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들은 별도의 입력 인터페이스 없이 초소형 디스플레이만 탑재한 개인화 단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가장 이상적인 디스플레이는 어떤 모습일지 의견을 나누곤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각자 다른 대학교로 진학했지만, 기술에 대한 궁리와 상상, 이야기는 계속됐다. 한 달에 서너 번씩은 만나 기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던 중 나중에 LetinAR 기술의 핵심인 핀 미러(Pin Mirror)를 만들어 내는 우연한 기회를 접하게 된다. 하정훈은 당시 과외 아르바이트로 김재혁의 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과외를 하던 중, 하정훈은 방안 벽에 비친 이미지를 보았다. 뿌옇기는 하지만 반대편 창 밖의 풍경이 뒤집어진 채로 벽에 투영되어 있었다. 순간 하정훈은 방이 마치 하나의 커다란 바늘구멍 사진기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하정훈은 좀 더 작은 구멍을 만들기 시작했다. 과외를 하다 말고 실험 정신을 발휘한 것이다. 신문지를 여러 장 덧대고 그 위에 작은 구멍을 뚫었다. 창에 작은 구멍만 남겨두자 그의 예상대로 방은 핀홀 카메라(Pin hole camera)가 되었다. 아까보다 훨씬 더 선명한 이미지가 창 맞은편 벽에 맺혔다. 호기심이 동했다. 그날 이후 핀홀 카메라의 원리에 대해 더 알아보았다.

핀홀은 작은 구멍으로 이미지를 투영하기 때문에 광량(光量, 빛의 양)이 적어 밝은 상을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훨씬 선명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카메라 렌즈는 밝은 이미지를 얻기 위해 큰 구멍과 여러 장의 렌즈를 사용한다. 때문에 밝고 선명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지만 초점이 맞는 구간은 극히 작아지게 되고, 초점 구간 이외의 물체는 뿌옇게 보인다. 이는 구경이 큰 카메라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웃포커싱(Out of Focus)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 핀홀 카메라는 아웃포커싱 현상을 억제할 수 있다. 사진 촬영 시 전경과 배경을 동시에 또렷이 찍고 싶으면 조리개를 조여야 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하정훈은 이 현상에서 힌트를 얻었다. ‘사람이 어느 곳을 보고 있든지 간에 핀홀 카메라 원리를 활용하면 망막에 또렷한 이미지를 투영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이 원리를 디스플레이 기술에 적용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바늘구멍 사진기의 원리가 유용할 수도 있겠다는 ‘느낌’만 가진 채로 이 둘은 여느 평범한 대학생과 같은 삶을 살았다. 학교를 다녔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점을 땄다. 김재혁 대표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새로운 학교에 입학하기도 했다. 각자 군에 입대해 오랜 시간 떨어져 있기도 했다. 그러다 핀홀 원리가 다시금 하정훈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간이 찾아온다. 강원도 철원의 전방부대에서 근무하던 하정훈이 과로로 사구체신염을 앓아 입원하게 된 것이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이야기가 있던가, 병원에 입원해서도 하정훈은 같은 병실에 있던 다른 병사들에게 과학 설(設)을 풀어냈다. 낮이면 평소에 흥미를 갖던 과학 원리에 대해서, 밤에는 별자리를 설명하면서 보냈다. 그러다 하정훈의 설은 자연스레 바늘구멍 사진기로 흘렀다. 입원실 전우들을 위해 그는 껌 종이의 은박지를 벗겨내고 손톱깎이로 작은 구멍을 냈다. 직접 핀홀 렌즈(Pin hole lens)를 만들어 보여줬다. 놀라워하는 전우들의 반응을 보고 그는 엉뚱하게도 사람이 쓰는 핀홀 렌즈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처음엔 콘택트렌즈 형태를 만들려 했던 하정훈은 이 생각을 김재혁에게 털어놓았다.

같은 시기 김재혁은 연구실 생활 중이었다. 그는 새로 옮긴 대학교의 학과에서 3년 내내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학부 연구원이 되었다. 그는 HCI(Human Computer Interface) 연구실에서 컴퓨터와 사람 사이의 연결(Interface)을 연구했다. 세부 연구 주제는 AR/VR을 활용한 교육과 의료였으며, AR/VR의 사용성 평가 연구도 함께 진행했다. 그래서였을까, 하정훈의 핀홀 아이디어는 자연스레 AR과 만나게 된다. 때마침 구글이 AR 글래스인 ‘구글 글래스(Google Glass)’ 를 내놓았던 시기와 맞물렸다. 둘은 ‘정말로 만들어 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이 처음 기술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2008년으로부터 7년이 지난 2015년에 처음으로 진지하게 구현을 고민하게 되었다. 자신들만의 광학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많은 시간과 돈이 필요할 것이고 이미 세워 두었던 계획들을 바꿔야만 했다. 평범한 인생 앞에서 그들은 도전의 운명을 마주하고 고민했다. 마포 고등학교의 기술 선생님으로 합격한 하정훈은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 직전이었다. 김재혁은 연구를 계속해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하정훈의 첫 출근 며칠 전 그들은 MWC 참관을 위해 스페인행 결심을 굳혔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들은 평범한 삶의 반대 길로 한걸음 내딛는 결정적 순간에도 ‘우리가 창업을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술을 구현해 내는 것’이 하고 싶었다. ‘창업’을 위해서 그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사업을 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 기술을 세상에 내놓고 싶었다.

이 둘은 머리에 쓰는 AR 디스플레이로 제품 구현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막상 제품 구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기술 콘셉트만 갖고 공장을 찾아 다녔다. 하드웨어 업체를 찾아가면 무시당하기 십상이었다. 돈도 노하우도 없이 맨땅에 헤딩만 반복했다. 2015년은 구글 글래스가 출시된 지 2년이 되는 해였다. 구글도 초점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눈과 너무 가까운 곳에 디스플레이가 위치해서 사용자들은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가까이 보았다가 멀리 보기를 반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구글도 초점으로 고생하는 상황인데 두 젊은 창업자가 ‘저희가 그 문제를 해결할 아이디어가 있습니다.’라며 공장 문을 두드렸다. 사람들이 믿기나 했을까?

‘갓 학부 졸업한 둘이 그 문제를 해결해?’

‘바늘구멍 원리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대기업도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스타트업이?’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창업 대회를 나가도 입상이 어려웠다. 어려운 상황이 계속됐지만 기술은 꾸준히 발전시켜 나아갔다. 콘택트렌즈 형태로 광학계를 만들고자 했던 계획도 바꿨다. 작은 구멍을 통해 투영되는 이미지만 또렷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반사경을 통해서 투영되는 이미지도 심도가 깊은, 매우 뚜렷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핀홀 원리는 아주 작은 거울을 활용한 ‘핀 미러(Pin Mirror)’로도 구현이 가능했다. 이렇게 거울을 활용하니 광학계를 구동하기 위한 다른 부품들을 광학계의 앞이 아닌 옆으로 옮겨 부피와 복잡도 면에서 개선이 가능했다. 나아가 여러 개의 거울을 나란히 나열하여 큰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도 가능했다. 이렇게 김재혁, 하정훈 두 창업자는 제법 큰 이미지를 사람의 시신경에 또렷이, 직접 투영할 수 있는 광학계를 만들고1) 기술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그들은 고등학교 시절의 막연한 아이디어가 제품으로 탄생할 수 있겠다고 점차 확신했다.

 

그렇게 기술의 완성도는 계속 높아졌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핀 미러 부품으로 쓰기 위한 작은 거울을 제작해야 했지만, 이를 만들어 주는 공장이 없었다. 문전 박대도 여러 번이었다. 그들은 직접 큰 거울을 조각 내 부품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렇다 보니 품질이 일정하지 않았다. 어렵게 핀 미러를 만들어 대기업 연구소에 들고 갔지만 학부를 갓 졸업한 두 창업자를 보고는 그들의 기술을 ‘대학교 연구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폄훼했다. 기술의 좋고 나쁨이 평가의 척도가 되기보다는 그것을 만드는 이들의 면면이 평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딱딱한 껍데기를 깨기가 어찌나 어려운지 몰랐다. 오기였을까? ‘그저 만들어보고 싶다’ 던 그들의 마음은 점차 ‘상품으로 선보이고 싶다’로 바뀌어 갔다.

다른 멤버를 영입하기로 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꿀 수 있는 멤버가 필요했다. 서울대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이상국과 함께 팀을 꾸리기로 했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에서 인공지능 분야의 뛰어난 연구자였던 이상국은 2015년 6월 한 해커톤에서 김재혁, 하정훈을 만난다. 셋 다 기술 창업에 관심이 많던 터라 의기투합했다. 김재혁과 하정훈은 하드웨어를, 이상국은 소프트웨어를 맡기로 했다. 이들은 Eyear라는 이름의 팀을 만들었다. 아직 법인은 아니었다. 마침 Eyear 팀을 만든 시기에 맞춰 ‘X프로젝트’ 라는 미래부의 대국민 연구 프로젝트 공모가 있었다. X프로젝트는 당시 미래창조과학부에서 펀드를 조성하고 차세대 먹거리 기술을 자격과 경력 무관하게 선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자격과 경력에 무관하다고는 하지만 대학 연구실들이 X프로젝트 지원 대상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Eyear는 일반 팀들 중 드물게 선발되었고, 상금 3,000만 원 중 1,000만 원을 시제품 제작에 쓸 수 있었다. 아이디어 검증이랍시고 공장과 기업들을 전전하며 시간과 돈을 허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후련함마저 들었다.

첫 번째 버전의 제품을 만들고 Eyear 팀은 크게 실망했다. 렌즈에 뜨는 이미지가 기대 이하였던 것이다. 빛의 파장과 특성에 기인해 발생하는 오류를 ‘광학 수차’라고 하는데 이들은 이러한 수차를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수차를 보정하는 작업을 통해 후속 버전을 개발했다. 만들고 다시 고치고를 반복하자 노하우가 쌓여 갔다. 첫 수정에는 6개월이 걸렸지만 그 다음 버전은 3개월 만에 만들 수 있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고 시제품이 만들어졌다. 마침내 제품을 보여주며 기술을 선보일 수 있었다. 일단 제품이 만들어지자 국책 과제에도, 창업 경진대회에도 나가기가 수월해졌다. 경기도 슈퍼맨 창조경제 오디션에서는 심사위원의 눈에 띄어 첫 투자를 받아냈다. 이때가 2016년 10월, 국책과제와 투자를 위해 결성된 팀이었던 Eyear는 법인 ‘LetinAR’2)로 업그레이드했다. 아쉽게도 이상국은 소프트웨어 개발에 좀 더 집중하고자 팀을 떠난다.3)

일이 잘 되려니 국책 과제도 수월하게 들어왔다. 눈사람을 만들 때 최초 조그맣고 단단하게 눈을 뭉치는 것은 쉽지 않다. 쌓인 눈 위에 조그맣게 뭉친 눈덩어리를 굴려도 좀처럼 커지지 않는다. 그 와중에 자꾸 부서지기도 하고 모양이 엉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굴려 사과 크기가 되고 멜론 크기가 되면 생각보다 쉽고 빠르게 눈덩이가 커진다. 팀의 인지도, 사업의 사이즈도 마치 눈사람을 만드는 것과 같다. 인지도를 쌓자 국책과제 비용 총 1억 원이 들어왔다. 투자금 1억 원을 합쳐 총 2억 원으로 기존 광학 모듈을 안경 형태로 바꾸었다. 콘셉트 형태의 광학 모듈도 안경알 형태로 만들었다. 기술이 목표에 더 근접할수록 난이도는 훨씬 더 높아졌다. 기존 모듈은 하나의 공장에서 생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경으로 만들려고 하니 필요한 부품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여러 공장에 동시에 여러 주문을 넣어야 했다. 공장에서 만들지 못하는 부품은 직접 만들거나 가공해야만 했다. 하다못해 지우개 똥을 뭉쳐서 부품으로 쓸 때도 있었다. 하루하루가 기술 장벽을 뛰어넘기 위한 도전이었다.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날이 갈수록 늘어갔다. 2017년 2월 안경 형태의 제품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제품이 완성되기 직전인 2017년 1월, 작업 중이던 안경을 갖고 CES에 참여했다. 단독 부스는 아니었다. 김재혁의 모교 한양대학교의 CES 부스 한구석을 얻어냈다. 하나의 부스를 다른 학생 창업자들과 나눠 썼다. 관객들의 눈길을 끌기 쉽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도 몇몇 기업들이 관심을 보였는데, 그 중 구글과 화웨이가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자신들도 해결하지 못한 광학 문제를 한국의 스타트업이 해결했다고 하니 여간 신기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김재혁과 하정훈은 2017년 CES에서 자신들의 가설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일은 무척 빨리 진행되었다. 2017년 3월 말 네이버 D2 Startup Factory에서 찾아왔다. 초기 기술 스타트업의 성장을 위한 투자와 지원을 제공한다고 했다. 네이버도 AR 기술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전략적 투자 의향이 있었다. 만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투자 결정이 내려졌다. 총 7억 원의 투자금을 유치할 수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제품을 지속적으로 고도화할 수 있었다. 사람도 더 뽑고 개발 프로세스도 만들었다. 제품 고도화는 더 빠르게 이루어졌다. 이제 문제는 성능을 높이고 기능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LetinAR은 2016년 10월 40억 원의 기업 가치를 인정받고 플래티넘 기술투자로부터 1억 원의 투자금을 받았다. 이어 네이버 D2 Startup Factory로부터 투자를 받을 때는 기업 가치 60억 원의 회사가 되어있었다. 법인을 설립하고 1년이 지나고 40억 원의 기업 가치를 인정받고, 이어 6개월 만에 20억 원의 기업 가치 상승이 있었다. 이러한 초기 기술 기업의 경우 기업의 가치를 산정하는 것이 까다롭다. 기업의 가치 산정(Valuation)은 기본적으로 수익성, 안정성, 성장률을 고려하여 이루어진다. 회사의 가치는 흔히 현금 흐름이라고 이야기하는 ‘수익성’과 비례한다. 반대로 할인율이 높은 경우, 즉 안정성이 낮은 경우 가치는 하락한다. 기업 성장의 가능성이 높으면 기업의 가치 산정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모든 기업의 수익성, 성장률, 안정성을 명징하게 추려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시장(Market), 자산(Asset), 수익(Income)을 종합적으로 조감하여 판단한다.

투자자는 보통 두 가지 접근 방법으로 기업의 가치 평가에 임한다. 기업의 본질가치를 가늠하는 ‘본질가치 평가’와 시장 내 다른 유사기업과의 가치 비교를 통해 추정하는 ‘비교가치 평가’가 그것이다. 본질가치 평가는 기업이 보유한 자산 가치와 수익 가치를 근거로 도출한다. 일반적으로 자산가치는 재무상태표상의 자기자본의 규모를 의미하고, 수익가치는 추정 순이익과 자본 환원율을 토대로 산출된다. 이렇게 산출된 자산가치와 수익가치를 종합하여 주당 본질가치를 산출할 수 있게 된다. 비교가치 평가는 평가 대상 회사와 영업위험 및 재무위험이 유사한 기업의 주가, 배수 등 가격 정보를 참조하여 가치를 추정하여 이루어진다. 산업, 시장, 재무 정보를 종합하여 유사 기업을 찾고 PER, EBIDTA, PSR, PCF4) 등을 평가 대상 기업의 가치 산정 근거로 활용하는 것이다.

LetinAR의 기업 가치는 어떻게 산정할 수 있었을까?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LetinAR처럼 수익과 이익이 없는 경우에는 동일 산업군의 비슷한 기업을 근거로 삼는다. 하지만 LetinAR의 경우 기술이 지닌 차별성 때문에 동일 산업군과의 비교도 어려웠다. 직원 수도 극히 적었고, 매출도, 이익도 없는 상황이었다. 비슷한 기술을 개발하여 참고할 만한 기업도 없었다. B2B 매출로 ‘몇 년간 얼마의 매출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는 있었지만, 목표는 목표일 뿐이다. 오죽하면 피터 드러커는 “매출 성장 계획을 제시하는 창업자를 믿지 말라.

어차피 맞지도 않을 테니까.”라는 이야기를 했을까? VC의 심사역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IR(Investor Relations, 일반적으로 투자자 대상의 기업 설명을 의미함) 자료의 후반부에 목표 매출과 이익 추정과 관련된 자료들이 들어가 있지만, 이는 일종의 심리적 안정을 위한 절차적 정보에 가까워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래서 초기 기술 기업의 경우 자신들의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철학적 맥락이 통하는 심사역을 찾아내고 소통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매출도 이익도 없는 상황에서 기술만으로 승부해야 하는 기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투자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LetinAR은 적절한 투자자를 찾아냈다고 볼 수 있다. LetinAR에 초기에 투자했던 플래티넘 기술투자와 네이버 D2 Startup Factory는 ‘기술의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투자자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플래티넘 기술 투자와 네이버 D2 Startup Factory는 왜 매출도 없고 규모도 작은 LetinAR에 투자를 결정했을까? 당시 D2 Startup Factory에서 LetinAR을 담당했던 심사역은 핀 미러 기술이 새 판을 열 수 있는 가능성에 집중했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뒤집어 시장의 큰 기회를 독식하다시피 한 기업의 사례가 많다. 칼 형태의 면도기를 탈부착이 가능한 면도기로 혁신한 질레트, 중국의 발효 식품인 꿰짭에 토마토를 첨가해 재탄생시킨 하인즈, 알카라인 배터리로 시장을 뒤집은 듀라셀 등이 그랬던 것처럼 LetinAR의 기술이 기존 AR 기술의 판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사용자가 어느 곳을 바라보든지 선명한 이미지를 띄워주는 AR 글래스는 존재하지 않았다. LetinAR은 그러한 기능을 시장에서 최초로, 단순한 구조로, 저렴하게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지금의 AR 광학계가 기술적 한계가 있어 재편된다면 그 시장에는 LetinAR이 있을 수도 있다. 투자자들은 그 가능성을 알아본 것이다. 아직 양산 단계에도 들지 않은 콘셉트 기술이긴 하지만, 현재 LetinAR의 기술은 여전히 독창적이다.

기존의 제품들은 제품에 기능을 더하면 더할수록 크기와 복잡도가 증가했다. 거대한 크기의 HMD(Head Mount Display) 형태가 되어갔다. 공정도 문제였다. 기술의 복잡도가 올라가고 들어가는 부품의 수가 늘어날수록 공정 복잡도도 상승했다. 대부분 굴절형 광학계를 사용하다 보니 색수차로 사용자들이 불편을 겪는 제품도 있었다. LetinAR은 핀 미러 기술로 기존의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아주 작은 거울을 고정밀 기술로 가공하여 안경의 렌즈 안에 삽입했다. 광학계가 단순해졌다. 제품의 크기도 혁신적으로 줄어들었다. 여러 거울을 나란히 배치하여 시야각을 넓혔다. 굴절이 아닌 반사형 광학계를 써서 색수차 걱정도 없었다. 구조가 단순하다 보니 제조공정도 단순하게 꾸밀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언제나 선명한 이미지를 통해 ‘생생한’ 이미지를 사용자의 눈에 투영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아래 동영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생동감을 주는 이미지의 첫 번째 조건은 선명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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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례로 국내 한 기업의 사례를 들어보자. 뮤지컬과 오페라를 위한 극장을 운영하던 이 기업은 외국어로 진행되는 뮤지컬이나 오페라 공연을 위해 화면 양쪽에 자막 공간을 두어 관객의 이해를 도왔다. 하지만 관객들은 무대와 화면을 번갈아 보는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고, 이에 AR 글래스를 도입하여 자막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했다. 안경으로 자막을 띄워주는 시도를 한 것이다. 좋은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안경과 혼용하기 어려워 사용이 제한적이었다. 나아가 눈앞의 안경에서 보이는 자막과 멀리 있는 무대를 번갈아 보면서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관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언론은 ‘혁신적인 서비스 모델’이라며 보도했지만 아쉽게도 이 서비스는 몇 달 가지 않아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LetinAR의 기술을 활용했다면 이런 문제는 쉽게 해결됐을 것이다. LetinAR의 기술은 도수가 있는 안경에 광학계를 넣기도 좋고, 심도가 깊은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사용자가 어느 곳을 보든지 또렷한 자막을 띄워줄 수 있다.

투자 이후 LetinAR은 제품을 고도화하여 2018년 CES에 다시 참여한다. CES 박람회는 스타트업들을 위해 Eureka Park라는 공간을 제공한다. 그곳에서 전 세계의 스타트업들이 부스를 차리고 자신들의 서비스와 기술을 홍보한다. 2018년 CES의 Eureka Park 최고의 스타 기업 중 하나가 바로 LetinAR이었다. 바로 1년 전 대학교 부스의 한구석에서 두 명의 창업자가 초라하게 선보였던 미완의 기술이 이제는 완성도 있는 안경이 되었다. 네 명의 직원이 CES에 참여하였고 투자자들도 함께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글로벌 IT 제조사들이 부스를 찾아왔다. 어떤 기업은 엔지니어, 사업 기획자, 디자이너 등 60명의 직원이 찾아와서 제품을 보고 갔다. 더 놀라운 것은 잠재적인 경쟁자로 생각되던 HMD 타입의 VR업체인 오큘러스, 매직 립 등도 소문을 듣고 우르르 몰려왔다는 것이다. 일 년 전 전 “Hmm… It’s pretty cool.”이었던 반응은 “It’s amazing!”으로 바뀌었다. CES 기간 내내 찾아왔던 기업들이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재촉하는 바람에 예정보다 일주일 이상을 더 라스베이거스에서 지내야만 했다. 투자와 협력, 제휴와 관련된 제안들이 쇄도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국에 돌아오자 투자자들이 먼저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LetinAR은 투자자와 투자 금액, 투자 조건을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최근 스타트업 시장에 투자 자금이 풀리기 시작한 것과 맞물려 이러한 상황은 더 심화되었다. 시장에 도는 투자금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스타트업의 수는 큰 변동이 없다 보니 좋은 기업에 너도나도 투자하겠다고 VC들이 달려드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스타트업 입장에서 이러한 상황이 반가울 법도 하지만 선택을 위한 고민이 만만치 않다. 스타트업 투자자, 이른바 VC들은 각각의 투자 철학을 지니고 있다. VC 별로 색깔과 장단점도 비교적 명확히 구분된다. 스타트업이 VC로부터 투자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돈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VC, 더 자세하게는 담당 심사역이 회사의 파트너로 들어오게 됨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스타트업은 VC와 심사역의 철학과 스타일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투자를 담당한 심사역은 스타트업의 대표가 경영과 관련해 발생하는 문제와 이에 따른 고민을 토로하고, 도움 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조력자가 될 것이다. 어떠한 투자자와 손을 잡느냐에 따라 성장이 더뎌질 수도, 혹은 빨라질 수도 있다. 물론 회사의 가치를 인정받고, 될 수 있으면 많은 금액의 투자를 받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여러 투자금 사이에서 착한 돈과 현명한 돈을 가려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LetinAR이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게 되고 나서 LetinAR의 기업 가치는 어떻게 변했을까? 아직 후속투자의 규모가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배 이상으로 상승한 상황이다.5) 기술의 완성도가 높아지고 직원이 더 늘었으니 상승하는 것이야 당연하다손 치더라도 배 이상의 가치 상승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기업의 가치가 증가한 것은 기본적으로 가치 산정이 협상 테이블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엄밀히 구분해 보면, 협상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은 기업의 가치가 아닌 기업의 주식 가격이다. 창업자들은 기업의 주식 가격을 최대한 인정받고 싶어하고 투자자는 보다 저렴한 가격에 주식을 취득하려고 한다. 두 당사자가 제시하는 가격의 중간 어느 즈음이 투자가 이루어지는 적정 가격이 된다. 본질가치나 비교가치는 협상의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도구다. 양 당사자가 수긍할 수 있는 근거를 갖추려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업이 널리 알려지고 인지도가 상승하면 협상 테이블에 앉는 투자자의 수도 늘어난다. 투자자들이 너도나도 기업의 주식을 매수하려 한다면, 자연스레 기업의 가치는 상승하게 된다. LetinAR이 CES에서 글로벌 기업들로부터 좋은 호응을 이끌어 냈고, 이들과의 협력이 구체화되는 시점에서 투자자들은 다른 평가를 해야만 했다. 더 많은 투자 제안이 들어오고 주식의 가격은 자연스럽게 상승했다.

정신과 의사 출신으로 여러 권의 투자 관련 베스트셀러를 썼던 알렉산더 엘더(Alexander Elder, 주가 보조지표 ‘Elder Ray’를 창안한 인물)는 “주가는 가치와 1마일 길이의 고무줄에 연결되어있는 것과 같다.” 는 이야기를 했다. 비록 본질가치의 움직임이 크지 않더라도 주식의 가격은 훨씬 더 변덕스럽게 움직인다는 이야기다. 시장 혹은 협상 테이블에서 정해진 가격이 기업의 가치를 말해주지 못할 때도 있다. 시장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아 투자자들이 돈을 싸 들고 기다려야만 했던 기업의 가치가 시장이 냉각되자 급전직하 내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업자들은 본질가치를 훨씬 상회하는 밸류에이션(가치)을 희망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아주 극소수의 창업자들만이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기업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려 한다. 무조건 높은 밸류에 많은 투자금을 유치하려 하기보다는 본질가치에 연동한 평가를 내리려 애쓴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가 저서 안티프레질과 블랙 스완에서 ‘예측하지 못한 변동’에 대해서 이야기했듯이, 일상의 이벤트보다 극단적으로 낮은 확률로 발생하는 ‘의외의 사건’이 기존의 모든 질서를 바꿀 수 있는 파급력을 지닌다. 혹자는 스타트업의 밸류에이션을 이야기하면서 검은 백조 이론까지 언급하는 것이 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한 밸류에이션 이후 시장이 침체되자 후속 투자 유치가 어려워진 상황이나 담당 심사역이 개인 사정으로 투자를 철회했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동반 투자자들도 투자를 접는 상황 등 의외의 변수가 상황을 어렵게 만드는 모습을 종종 접할 수 있다. 결국 질문은 왜 투자를 받는가로 돌아간다. 스타트업이 투자를 유치할 때에는 투자를 받는 이유와 목적이 분명하고, 어떠한 용도로 돈을 사용하는지 명확해야 한다. 창업자들은 지금 사업에 어떠한 변수가 있는지를 파악하고 그 중 투자금으로 소거할 수 있는 위험이 무엇인지, 투자를 받음으로써 새롭게 발생하는 변수는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투자 유치를 시작해야만 한다.

LetinAR은 이제 새로운 단계의 도약 앞에 서 있다. 지금껏 회사 설립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기술 개발에 투자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다른 성장의 과제가 남아있다. 사람이 성장하면서 뇌만 성장하거나, 심폐기관만 성장할 수는 없다. 뇌가 성장하려면 자연스레 골격도 커져야 하고 근육도 붙어야 한다. 그뿐인가, 성장의 과정에 적절한 경험도 필수적이다. 다행히 사람의 몸은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고 있다. 반면 기업은 기업 각각의 고유한 성장 방정식이 존재한다. 경영학에서 제시하는 많은 이론들은 기업 성장의 좋은 재료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영학적 전략들을 단순히 회사에 적용만 한다고 해서 회사가 바르게 성장하지는 않는다. 회사의 특성과 회사가 목표로 하는 시장, 구성원의 조합 등에 따라 ‘성장 레시피’를 만들어야 한다. 경영학적 전략은 재료에 불과하다. 기본적으로 레시피를 만드는 과정은 상상력과 trial-and-error의 결합이다. 앞으로 LetinAR도 이런 반복과 실패의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이 기술에 있어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LetinAR의 길지 않은 역사를 들여다보면 매우 흥미롭다. 무엇보다 이들에게는 다른 창업자들이 비장하게 결단해야만 했던 ‘큰 결심’이 없었다. 10년 전 친구 동생을 가르치던 방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바늘구멍 사진기를 글로벌 기업들이 주목하는 핀 미러 디스플레이로 바꿔 나가는 과정은 축적의 과정이었다. 하정훈 CTO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난 그저 무엇인가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창업을 결심해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저 만들다 보니까 그 결과가 창업이었던 거예요”

하정훈의 이야기를 듣던 김재혁 대표는 덧붙였다.

“무엇인가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향해 착실히 걸어가는 과정이 먼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는 창업 자체를 꿈꾸는 사람은 창업을 하지 않았으면 해요. 목표를 꿈꾸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 창업인 사람이 창업을 했으면 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기업에게는 각자의 성공 레시피가 있다. 창업의 방식도 기업별로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들이 자신 있게 축적을 강조하는 것은 창업이 충분히 어렵고 위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재혁 대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충분히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도움을 받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것 같아요. 이를 바탕으로 충분한 정보를 얻고 충분히 많은 시도를 해야 합니다. 지르는 것은 그 이후에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아시잖아요. 창업은 질러버리면 수습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면 인생이 바뀌잖아요. 신중했으면 좋겠어요.”

LetinAR은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그들의 비전을 향해 쌓아온 것들의 결과물이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대학에 들어가서도, 군대를 가고, 그리고 제품을 만들면서 이 방향성을 향해 조금씩 걸어왔다. 이들은 믿는다. 결국 스마트폰은 사라질 것이라고. 개인화 기기의 입출력은 말과 소리, 제스처와 기타의 방법으로 대체될 것이다. 그리고 정보는 세상과 눈 사이의 얇은 유리 한 장 위에 펼쳐질 것이다. LetinAR은 그때가 오면 어떠한 기능과 형태의 디바이스가 출현할지 큰 관심이 없다. 그들은 단지, 어떠한 형태의 디바이스가 되었든지 간에 그 안에 LetinAR의 렌즈가 사용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주석]

1) LetinAR 광학계의 해상도는 16K 해상도를 지원할 수 있다. 화면이 나타나는 시야각은 71°로 구글 글래스의 13°의 4배 이상이다.

2) 법인명은 (주)레티널

3) 이후 이상국은 V.DO라는 인공지능 기반 영상 솔루션 회사를 설립한다. 현재 V.DO의 CEO이고 (주)레티널의 주주이다.

4) PER (Price-Earnings Ratio, 주가수익비율) – 가장 보편적 비교가치 평가 척도
EBITDA (Earnings before Interest, Taxes, Depreciation and Amortization, 법인세 이자 감가상각비 차감 전 영업이익) – 현금 흐름의 대용치로 사용, 동일 산업군 기업의 마진을 추정하기 좋음
PSR (Price-Sales Ratio, 주가매상비율) – 안정적인 마진율과 매출액을 가진 기업에 적용하기 좋음
PCF (Price-to-Cash Flow, 주가현금흐름비율) – 동일 산업군의 기업이 갖는 주가당 현금 흐름을 추정하기 좋음

5) 주식회사 레티널은 2018년 8월 플래티넘 기술투자, 네이버, 코라아에셋증권, 카카오 벤처스, DSC 인베스트먼트로부터 추가 투자를 확정 지었다. – https://platum.kr/archives/107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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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진

원수섭

원수섭

원수섭은 DSC 인베스트먼트에서 투자 심사역으로 근무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학부부터 석사까지 컴퓨터과학을 전공했다. 삼성전자 네트워크 사업부에서 개발자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삼성을 퇴사하고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at Chapel Hill에 박사과정을 시작했지만 수료에 그쳤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KT, 네이버에서 경제경영 연구소, 정책 대응, 신사업 발굴 등의 업무를 맡았다. 네이버에 입사하기 전, 주식회사 브리즈라는 스타트업을 설립하여 경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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